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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철학&문학&교육

[책] 지식도둑의 책수집

by 한량소년 2014. 10. 1.


  대학원에 들어와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책을 마음껏 사모은다는 것이다. 원래 읽기 전에 일단 사놓고 보는 버릇이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보다 당연하게 ‘책수집’을 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사모은 책만 자그마치 60권에 달하니, 대략 3~4일에 한 권 가량 구입한 셈이다. 그 중 몇 권이나 읽었거나 읽기를 시도해보았는지는 비밀로 부치겠다.ㅎㅎ 분명한 것은 내 읽기능력에 비해 제법 많은 책을 수집하였다는 것이다.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대략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전공과 수업 등 필요에 의해 구입한 책이 첫 번째이고, 전공이나 수업에 의해 촉발된 관심에 따라 굳이 구입하지 않았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무리를 한 것들이 두 번째이다. 마지막으로, 그저 내가 읽고 싶어서 구입한 책들이 있다. 양으로 따지면 세 번째가 가장 많다. 첫 번째 책들이야 당연히 읽거나 참조하였을테니 구입에 합당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겠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둘 째와 셋 째 것들이다. 이들은 분명 내 과욕의 산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상황을 어찌 보아야 할까? 우선 내 책장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우와~ 책을 정말 많이 읽으시는군요!” 걸려들었다. 이거 착각이다.ㅎㅎ

“좋은 책이 참 많네요. 나도 분발해야겠어요.” 좋은 책인 것은 맞다. 그런데 당신도 나만큼 지출할 용의가 있다면 이 정도는 금방이다.

“책 모으는 것을 즐기시는군요!” 이 사람 예리하다. 난 그저 사모았을 뿐.ㅎㅎ


▼ 현재 연구실 책장


  나는 왜 이렇게 책을 사모으는가?


  일단 그냥 좋다. 엥?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나는 책 사는 것이 좋다. 인터넷서점에 주문하고 결제할 때마다 느끼는 그 희열은 말로는 설명을 못 하겠다. 카드번호를 입력한 후 최종승인 버튼을 누를 때 살짝 미간이 찌푸려지기는 하지만, 내 고정수입에 이 정도 금액은 별거 아니라는 여유로움을 부리며 과감히 버튼을 누른다. 보통 하루나 이틀 후 낯익은 택배기사님은 늘 비슷한 시각(오후2~4시)에 연구실 문을 두들기시고는, 예의 시크한 목소리로 “이종선님”을 부른다. 그리고는 황급히 사라지신다. 지금껏 대학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지만, 이 분의 건조한 목소리만큼 내 고막에 짜릿한 진동을 전해주는 분은 일찌기 없었다. 누구는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고 하던데(김춘수님의 ‘꽃’을 떠올려보자.), 나는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책’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그저 책이고 싶다.


  그저 낭만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때 나의 지적 관심이 머물렀던 곳을 기록해두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책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특히 요즘처럼 지식의 반감기가 짧은 시대라면 웬만한 책은 그 수명이 10년을 넘기기 어렵다. 이 중 어떤 책은 나의 선택을 받고, 나머지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두뇌 속의 정보처리와 망각 작용이 빠를 수록 더 많은 선택과 탈락을 반복할 것이다. 이 때 나의 레이더망이 포착한 책은 특별한 매력을 내뿜은 것이 아닌가? 이런 냉엄한 현실에서 사놓지 않은 책을 훗날 다시 찾게 될 확률은? 거의 제로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사놓아야 한다. 책장에 꽂아놓아야 한다. 일단 사놓으면 결국은 펼치게 된다. 수년이 지나도 펼치지 않는 책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책장은 바로 나의 지적 지도나 다름이 없다. 그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 뿐인가. 일단 꽂아두면 멋있다. 뿌듯하다. 인간은 원래 인정 받고 살아야 한다. 가끔 오페라도 보고 여행도 좋지만, 책도 좋은 아이템이다. 그 기분 궁금한 사람들은 한번 따라해보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허세 작렬한다고 손가락질 할 사람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 허세가 향하는 방향이다. 책이라면 고급차나 명품가방보다는 용인해줄 수 있지 않겠나.


  읽고자 하는 열망은, 4교시 후 식당을 향한 후각만큼 예민하고, 컴컴한 밤 푸세식 화장실에서의 청각만큼 진지하다. 공부하는 사람은 응당 책을 읽어야 하고, 자고로 그 책은 지은이에 대한 경의를 담아 직접 사읽어야 한다는 것이 나름의 소신이다. 날이 갈수록 출판시장이 축소되고 투자(투자라 쓰고 투기라 읽는다)와 처세를 주제로 한 책들 위주로 소비되는 현실에서, 지식도둑으로서 조금이나마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좋은 책'에 지갑을 여는 일이다. 오늘도 두 권의 책(이름과 필연, 센스 앤 넌센스)을 더 주문했다. 채워져가는 책장만큼 내 마음은 풍요롭다. 


▼ 내 책상과 책장. 아래 차례로 3월, 7월, 9월.






2014.09.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