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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Menti

8월 13일(수), 장하준 [경제학의 백화제방과 이종교배]

by 한량소년 2014. 8. 17.

(이 글은 2014년 8월 14일 있었던 장하준교수의 특강을 중심으로 필자와의 인연(?)을 정리한 것이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경제학자인 장하준 교수를 직접 만나 강연을 듣고 그 기쁨에 이렇게 이상한 글을 적어보았다. 평소 특정한 인물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이 사람만큼은 이해해달라.ㅎㅎ


  일단 장하준은 누구인지 궁금하면 링크를 클릭 http://ko.wikipedia.org/wiki/장하준



장하준 교수의 특강



  이 날 강연은 [백화제방과 이종교배]라는 제목으로 아시아경제연구소 삼익홀에서 진행되었다.  우리 지도교수님께서 함께 가자고 먼저 제안해주신 덕분에 다른 연구생 3명과 더불어 앞자리를 점할 수 있었다. 


  경제학에는 많은 이론과 학파가 있다. 장하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주류학파인 '신고전주의'를 포함하여 아홉가지 가량의 대표적인 경제학파가 있고, 규모가 작은 학파들을 포함하면 이보다 더 많다고 한다. 그는 이 학파들이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각 학파의 경계도 그리 명확하지 않다고 말한다. 각각의 이론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고 각각의 장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적절한 이론을 활용하여 보다 나은 경제정책, 보다 나은 경제공동체를 구축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나치게 '신고전주의'학파 일변도의 경제학 풍토를 가진 대한민국의 현실을 겨냥한 것이다. 모택동이 "백화제방 백가쟁명. 온갖 꽃이 같이 피고, 온갖 학파가 논쟁을 벌이게 된다."라고 말했듯이, 다양한 학파가 함께 어우러졌을 때 현실에 보다 적합한 우리 경제환경이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강의의 바탕은 최근에 출간된 [장하준의 경제학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자세한 강의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으니 궁금한 사람은 확인해보기 바란다(뒤로 갈수록 점점 불성실해지지만.ㅎㅎ).


  강의록 보기 클릭(에버노트)





  아래는 장하준 교수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평소 좋아하던 학자를 직접 만나보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세상에 얼마나 더 있겠는가~ㅎㅎ




  미리 구입해 둔 책에 서명을 받으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 세계적인 석학에 걸맞는 소탈함이다.


-실제 대화-


장 : 이름과 전공이 무언가요?
이 : 물리교육 전공하는 대학원생 이종선입니다.
장 : (사인을 하려다 멈추며 놀란 표정으로) 그런데 왜 여기에 오셨어요?
이 : 선생님 책을 몇 권 사서 읽었구요, 평소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장 : (호기심을 보이며) 왜요?
이 : 고등학교 때 경제학을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머가 잘 안 됐지요.
장 : 잘 안 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허허허~ (경제학 안 하길 잘 했다는 뜻인 듯)
(이후 사인)




장하준과의 첫 인연(?). 국가의 역할, 나쁜 사마리아인들.


  내가 처음 장하준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학사장교로 군에 입대하여 4개월 간 임관 전 훈련을 받고난 후, 나는 다시 전남 장성에 있는 포병학교에서 4개월 간 OBC교육(임관 후 병과 훈련을 받는 절차)을 받게 되었다. 이 포병학교란 곳은 이미 장교가 된 군인들에게 야전에 배치되기 전 갖추어야 할 포병의 전술과 기능을 가르치는 군대 내 '전문교육기관'으로서 기능에 충실하였을 뿐 아니라, 병과지식 이외의 다양한 교양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제도가 '신문구독'과 '연등' 제도였다(나는 이 점에 대해 지금도 감사히 여기고 있다).


  신문구독제도는 학생이 원하기만 하면 아침에 조간신문을 구독할 수 있는 제도였다. 아마도 지역의 한 배급사를 통하는 것 같았고 5시 반쯤 신문이 학교로 도착했다. 지금은 보다 사정이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한겨레신문은 구독할 수 없었고, 조중동 이외에는 경제신문이나 경향신문 등이 제공되는 종류였다. 입대 전 한겨레신문을 즐겨보았던 초임장교로서 당시 훈육장교와 나누었던 대화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성함은 기억나지 않는 훈육장교님의 배려(?)로 처음으로 경향신문을 보게 된 에피소드다. "한겨레신문을 볼 수는 없겠습니까(군대에서 '요'로 끝나는 말은 쓸 수 없다.)?", "아무래도 한겨레는 좀 어렵지 않겠냐?ㅎㅎ 경향이 있으니 대신 그 걸로 하는 건 어떻겠나." 이렇게 경향신문을 처음 보게 되었고, 다른 동기가 보던 보수지를 번갈아보며 나름 균형잡힌 시각을 갖추는 데 도움을 받았다.ㅎㅎ (이듬 해 경향신문은 [책읽기365]라는 매일 한 권씩의 양서를 추천하는 작은 섹션을 제공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연등제도는 밤 10시 취침시각을 넘어 2시간 더 공부하고 잘 수 있는 제도였다. 6시간 이상의 충분한 취침시간을 규정하였기 때문에 그 이상의 연등은 허용되지 않았다. 저녁 시간 이후 특별한 야간교육이나 청소시간 등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개인시간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대략 산술적으로도 하루 4시간 이상의 개인공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아침 일과 시작 전과 일과 중 짜투리 시간 등을 더하면 하룻동안 제법 많은 시간을 공부에 할애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처지였기에 나는 '책이나 읽자'라는 생각으로 매일 밤 11시 반까지 연등을 읽고, 다음 날 4시 반이면 몰래 일어났다(이건 엄연한 '불법'이었지만). 이 시간들은 대체로 책을 읽는 데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간과 시간의 제한된 환경이 오히려 책읽기에는 유리한 구조로 작용했던 셈이다.


  이 당시 읽은 책들 중 기억나는 것이 사이쇼 히로시의 [아침형 인간], 신영복의 [강의], 최장집의 [민주주의의 민주화] 등이다. 그리고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이었다. 이 중 [국가의 역할]은 경제와 정치의 관계, 경제에서 개발주의 전통이 갖는 의의 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 의미 있는 책이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장하준이라고 하는 사람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전 [사다리 걷어차기]보다는 여기 [국가의 역할]을 통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박정희 개발독재 시기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제시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격한 찬반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그 중 비교적 개혁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 지지와 찬사를 보낸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현재까지도 장하준 교수는 경제학에서 비주류라고 불리는 듯 하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피로를 위로받을 수 있었고, 이는 이후 장하준 교수의 또 다른 책들도 즐겨 읽는 계기가 되었다.


  자대 배치를 받고난 2007년 더 유명한 책이 발간된다. [나쁜 사마리안인들]이라는 논란의 책이다. 이 책은 2008년 당시 국방부에 의해 '불온서적'에 포함되며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는데, 오히려 이 것이 결과적으로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시작한 장하준 교수와의 인연은 이후 몇 권의 책과 TV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마치 둘이 아는 사이인 것처럼ㅎㅎ).


  국방부 불온서적이란? http://ko.wikipedia.org/wiki/대한민국의_불온서적



     

출처 : Daum 책


내가 장하준을 좋아하는 이유


   교육자로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제 역할에나 충실하면 될텐데 왠 경제학이냐구? 물론 난 경제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데 경제학은 교육학이나 물리학보다 어쩌면 더 큰 통찰을 제공해줄지도 모른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장하준 교수처럼 대중을 상대로 경제학을 풀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런 책을 즐겨 읽는 것이다. 사실 내가 장하준 교수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신처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포괄하고 있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진정성(어디까지나 내 생각)'을 결코 의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복지국가모델'이야말로 경제정의의 실현에 부합하며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경제모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것이다.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인데 비주류로서의 삶도 나와 닮았다(그러나 그는 무려 케임브리지의 석좌교수다ㅎㅎ). 마지막으로 이건 나와 닮지 않은 부분인데, 명문가에 태어나 자기 안위에 만족할 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권위에의 도전의 길을 택한 그와 같은 삶이야말로, 나와 같은 민초들에게는 진정 따라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2014.08.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