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서 재규어와 이안 칼럼에 대한 영상을 우연히 보고 추억에 잠겨 적어보았다.)
한 남학생의 로망, 재규어
▲ Jaguar XJ (X350) (2003-2007)
중고딩 시절 자동차디자이너를 꿈꿨던 적이 있다. 초딩 때까지는 굴삭기, 콤바인 등의 특수장비를 즐겨 그리다가, 중딩이 된 이후로 BMW, 크라이슬러 따위를 그리는 것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길 위의 웬만한 차량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고 연습장 몇권을 자동차 그림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당시 자동차에 대한 나의 열정은 보통 이상이었다.
고3 때 볼펜 드로잉으로 사물 그리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무려” 밤을 새워가며 볼보를 그려 갔다. 미술 선생님은 특별한 코멘트와 함께 A를 주셨다. 그것은 내가 그린 마지막 자동차였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지만 미술 계열 대학으로의 진학을 고려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동차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역시 열정이 구체적인 실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자동차디자이너가 되는 구체적 경로를 이해하고 있었다면, 취향을 현실화 할 의지가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나는 자동차나 비슷한 무언가를 디자인하고 있었을 것이다. 꿈을 이루는 데 있어 환경의 도움은 어쩌면 절대적인지 모른다.
한 때 자동차디자이너를 꿈꾸던 학생으로서, 최고의 디자인은 언제나 재규어였다.
누구나 BMW의 키드니그릴에서 탄탄한 주행성능과 강력함을, 메르세데스의 삼각별로부터 안락함과 신분상승의 만족감을 기대하는 것에 비하면, 재규어는 2% 부족할지 모르겠다. 재규어는 화려한 주행성능도, 안락함과 부의 상징성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스퍼트 전 한껏 몸을 움츠린 재규어(beast)마냥, 재규어(car)의 커브 라인은 묘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람보르기니의 그것처럼 저돌적이거나, 페라리처럼 섹시하지는 않다. 단지 근엄하고 보수적인 어떤 것,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져보이는 촌스러움처럼 보이는 그것 뿐이다.
한 맹수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이름과 심볼을 빌려왔음에도, 결코 과하지 않은 것이 재규어의 매력이다. 각그랜져가 도로를 달리고 세계의 명차들이 온통 곧게 뻗은 직선으로 무장하였을 때에조차, 재규어는 특유의 커브 라인을 포기한 적이 없다. 해가지지 않던 제국의 영광은 이미 저문지 모르지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국신사의 마지막 자존심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고등학교 선배를 만났는데 대뜸, “재규어 타냐?”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내가 예전에 커서 재규어를 탈 거란 말을 밥먹듯 했었다고 한다. 그땐 별 대답을 안 했지만 지금 정확히 대답하면, 안타깝게도 내가 재규어 오너가 될 가능성은 요원하다 하겠다. 역시 열정이 구체적인 실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연히 본 영상을 보며 잠시 추억에 잠겨보았다. 혹시 외제차 구입을 고려하는 분이 있다면, 재규어를 권한다. 그리고 제일 먼저 나에게 오라.ㅎㅎ
2016.01.0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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