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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할아버지 전상서

by 한량소년 2013. 12. 28.

할아버지 전상서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막내손주 종선이에요.

오늘은 갑자기 할아버지가 생각났어요.

연필을 들고는 그렇게 글쓰기를 싫어했던 저인데, 블로그라는 것을 시작하고 보니 할아버지께 편지까지 쓰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0년 2월, 비교적 이른 시기(향년 68세)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소 지나치게 즐기시던 약주가 원인이 되어 간쪽에 문제가 생기셨던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약주를 줄이시라고 당부드렸을텐데, 그 고집을 꺾기가 그렇게 힘드셨나요.


할아버지 용서하십시오.

이제 와서 고백드리지만, 당신께서 떠나시던 날 밤 저는 건넌방에서 형누나들과 함께 코미디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죽음의 문턱에서 힘겹게 싸우고 계시던 그 때, 저는 아무렇게나 웃고 떠들고 있었던 거지요.

그 때 저는 잠시 할아버지를 잊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단지 나이어림을 탓하기에는 너무 괘씸했습니다.

단종도 12살에 아버지를 잃고 조선의 왕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손주를 한없이 아끼고 사랑해주신 분이 당신이십니다.


당신의 임종소식은 어머니께서 전해주셨습니다.

지난 15년 간 정성스레 당신의 아침밥을 차려드린 당신의 하나뿐인 그 며느리말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며 눈믈을 많이 흘리신 분이죠.

당신께서 몹쓸 병에 걸리신 것이 부덕한 본인의 잘못이라고 자책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소식을 전하던 그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단단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 시아버지의 그 며느리답더군요.


사실 제가 그 어린 나이에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기나 했겠습니까.

남겨진 자가 짊어질 고통을 짐작이나 했을까요.

그렇지만 눈물은 빗물처럼 볼을 타고 내리더군요.

당신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상실감때문이었겠지요. 


아! 할아버지.

1989년 3월 어린 손주 녀석이 학교라는 낯선 곳에 첫발을 들여놓던 날, 

대부분 엄마손을 붙잡고 집을 나섰을 아이들과 달리, 당신꼐서는 그 마지막 핏줄을 당신의 자전거 앞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처음 만난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

낯선 공간.

그 어떤 것들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태산보다 큰 당신이 교실 뒷편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그 시절 국민학교 가을운동회는 동네잔치였습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프로그램도 빠질 수 없었죠.

하지만 당신께서는 결코 날랜 걸음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체통없이 그깟 상품때문에 경박하게 걸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걸음을 이 손주가 그대로 물려받았네요.

물론 친구들은 가끔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제 걸음을 보고 당신을 떠올리곤 하니 저는 그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벌써 23년이 넘었습니다..

조금만 더 곁에서 지켜봐주셨다면 이 못난 손주가 더 잘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보고싶습니다.


2013.12.28.(토)


▼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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