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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강의조교 임무 완수기

by 라떼아범 2014. 5. 28.


(물리교육 실습 및 분석이라는 강좌는 교육실습을 앞둔 학부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이다.)


강의조교 임무 완수기.



▲ 출처 : Daum영화



  베트남전의 최초 전투이자 승전이라는 실화를 담은 영화 ‘위워솔져스(We were soldiers.)’에서 멜깁슨이 분한 무어 중령은 출격에 앞서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귀관들을 모두 무사히 데려오겠다는 약속은 해줄 수 없다. 그러나 귀관들과 전지전능한 주님 앞에 이것만은 맹세한다. 우리가 전투에 투입되면 내가 맨 먼저 적진을 밟을 것이고, 내가 맨 마지막에 적진에서 나올 것이며, 단 한 명도 내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 


  영화의 개봉일은 2002년이었지만 한참 후 군복무 시절 중에 영화를 처음 보았다. 사실 나는 보는 이에게 뻔한 교훈과 감동을 강요하는 영화나 소설 따위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그렇다고 내가 냉혈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영화처럼 당위성을 찾기 어려운 ‘전쟁’을 배경으로 영움담을 그리는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스토리는 기억을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무어 중령의 연설만큼은 지금까지도 나의 머릿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군입대 직전까지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었고, 당시 부하병사들을 거느린 초급장교로 직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무어 중령은 현장에 있던 장병들과 가족들을 전율케 하는 명연설을 펼친 것 뿐 아니라, 실제 전쟁터에서 그 약속을 지킨다. 


  지휘관과 선생, 그들은 모두 책임과 명예라는 한없이 무거운 가치를 담는 대표적 이름이다. 따라서 그 언저리 주위에 있던 나에게 중령의 약속과 실천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디 나뿐이겠는가. 진정한 리더의 자세를 묻는 질문은 오래 전부터 인류가 던져왔던 화두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논의에 그친 경우도 많았지만 말이다. 특히 침몰한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를 보며 누구나 한번쯤 비슷한 물음을 던져보았을 것이다. 군인에서 교사로 돌아온 지금, 교육을 연구하는 학생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더해 같은 물음을 던져보자. 진정한 리더, 진정한 교육자, 진정한 선생님의 자세는 무엇인가?



특별한 강의


  [물리교과 수업실습 및 분석]이라는 강좌는 5월 교생실습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한’ 강좌이다.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강좌가 기존의 강좌들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성격에서 다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형식'의 파괴이다. 보통 대부분의 강좌에서 교수님은 내용을 전달하고, 학생들은 그것을 배운다. 대부분 정해진 목적과 틀에 따라 진행되고, 과제나 토론 등의 방법을 통해 학생들은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본 강좌 역시 과제와 토론 등의 방법은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이에 끊임없는 반성과 자기성찰의 요구가 더해진다. 잘 이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잘 고민하는 것이 본 강좌에서는 진정 중요하다. 제자리에 머물러 어미새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그저 받아먹기만 하는 새끼새와 같은 자세는 기본적으로 이 강좌에서 상정하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꽤나 부담이 컸을 것이다. 


  다음으로 ‘관계'의 파괴이다. 학생들은 대개 같은 처지로서 함께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기쁨과 애환을 공유할 것이다. 여기에는 강좌 자체와 교수님, 조교 등을 자신들과는 분리하여 보는 이분적 사고가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본 강좌에서 학생들은 서로 동료로서 비롯되는 공감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과 학생으로서, 멘토와 멘티로서, 평가자와 평가를 받는 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부여하였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방, 다른 화분에서 자라나는 각각의 생명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거름이 되어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진정한 생명을 이루는 새로운 관계맺기를 요구받는다. 이는 일찍이 장회익 선생이 말했던 온생명의 철학과 유사하다. 학생 개인은 낱생명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보생명으로 기능해줄 때야 비로소 온생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에서는 교수님과 조교마저 한 데 어우러진다(단, 여기서 강좌를 운영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교수자와 학습자와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 안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나 역시 조교로 참여하며 학생들과 한데 어우러져 그들에 버금가는 성장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단지 내가 얻은만큼 기여했는지는 스스로 자부할 수 없지만…



초심과 도전


  학교에 있다보면 어느새 관성에 젖어 수업에 대한 고민을 소홀히 하게 되는 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는 대체로 교사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 여러가지 부수적인 일들로 교사가 수업 자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관료적 학교문화로부터 기인한 바가 크다. 그래서 교사 개인의 특별한 노력이 있지 않으면, 본 강좌에서처럼 수업의 한 장면을 놓고 깊이 고민해볼 기회는 사실상 많지 않다. 특히 중심에서 한걸음 물러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듣고 나의 생각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는 특히 얻기 어렵다. 게다가 나는 이제 막 실습을 앞두고 있는, 그래서 교육을 편견없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고, 넘치는 의욕을 지닌 예비교생들의 생생하고 치열한 고민과 노력의 현장을 함께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내가 기대한 것은 크게 다음 두가지였다. 


  첫째로 ‘초심’이다. 어떤 글에서 보니 소원을 이루려면 세가지 ‘심’이 필요하다고 한다. 시작할 때의 마음인 ‘초심', 그 마음을 불태우는 ‘열심', 포기하지 않는 ‘뒷심’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초심이라고 한다. 초심은 열심과 뒷심을 지탱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교사로서 학교와 학생들에 충실하였고, 자기계발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주변사람들과도 원만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틈틈이 공부하며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고, 때로는 분에 넘치는 명성을 얻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내가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 잘 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어느새 사람들 앞에서 뻣뻣해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고, 부족한 능력을 언술과 능청으로 덮어버리려 하는 스스로에 놀라기도 하였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이 들었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난파선이 우연히 보물섬을 발견하게 될 때를 바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대학원이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솔직하고 열정이 넘치는 젊은 학생들을 거울 삼아 나의 초심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둘째로 ‘도전'이다. 나는 본 강좌에 조교로서 참가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나야 정식 수강생이 아니므로 교수님을 도와 적당히 내 할일을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곧 조교로서 해야할 역할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학부생들과 항상 어울려 논의도 해야 하고, 때로는 조언이랄지 평가랄지 감히 잘난 척, 아는 척을 해야 한다고 하니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대충 무난하게 넘어가려 했던 나의 1학기 계획이 본 강의때문에 꼬이는 것이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좀더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상황은 나에게 위기가 아니라,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와 교육 모든 면에서 지식과 경험이 충분치 않고 게다가 인격적으로도 절차탁마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오히려 그런 나이기에 보다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본 강좌를 맞이한다면 나에게도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물론 가엾은 학부생들을 볼모로 잡아놓고 말이다. 그렇게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성장


  본 강좌에서 나의 역할은 강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여 누리집에 올리는 일, 특정 주제에 대하여 즉흥적으로 나의 견해를 밝히는 일 정도였다. 추가적으로 강좌 중반에 학생들의 수업계획을 함께 검토해주고, 막바지에 시범수업을 참관하고 피드백해주는 일이었다. 학생들 이외에 대학원생인 나와 안정곤 선생님, 연구년으로 참여하신 김경미 선생님 이렇게 세명의 현직교사가 함께하게 된 것은 무척 의미있는 일이었다. 교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계신 듯 보였다. 나 역시도 3년여 짧은 교직경험이었지만 나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건데, 나는 무엇인가 말해야 할 때 늘 어려웠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처음 물리학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난다. 학생들은 대부분 자연의 근본적 물음에 대해 답해주는 물리학의 매력에 빠져 물리교육을 전공으로 선택하였다고 한다. 학습자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의미가 있다는 입장을 대부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리학이 어렵고 노력에 비해 좋은 점수를 얻기 어려워서 학생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단순히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를 끌어들인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물리학 지식을 보는 객관주의와 상대주의 관점 중에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이러한 딜레마에 놓인 교사의 상황이 우리 논의의 출발선이었다. 그동안 나 역시도 많이 고민해보지 않은 주제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했다. 대체로 학생들은 모든 학습자가 과학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물리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를 위해 역사적이고 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것도 필요하고, 경험과는 거리가 있더라도 올바른 과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하었다. 이는 대학 때부터 줄곧 구성주의적 교육관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내가 대학생 때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가장 놀라웠던 것은 학생들이 각자 자기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사실 스스로 지식이 부족하거나 식견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면 권위있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만의 논리를 펼치기 어려울 때가 많은 법인데,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책은 교육에 대한 지나친 기술적, 전문적 관점에 경종을 울리고, 교사의 정체성과 성실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 준 의미있는 책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나의 교육관을 점검해보고 학생들의 생각을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위대한 사물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특히 학생들이 수업시연을 할 때 내가 생각했던 위대한 사물과 수업자가 의도했던 위대한 사물, 교수님께서 평가하신 위대한 사물이 각각 다른 경우가 여러차례 있었다. 위대한 사물을 특정한 소재로 볼 것인지 어떤 목적이나 의미와 같은 무엇으로 볼 것인지가 내 스스로 잘 정립하지 못해서 빚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내가 이해력이 부족해서인가 싶기도 하다. 앞으로도 보다 깊이 생각해보아야겠다.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학생들의 수업시연이었다. 대학 4학년 때를 떠올려보면 나는 당시 수업안도 제대로 꾸밀 줄 모르는 ‘초짜’였다. 대학 내내 전공공부는 소홀히 하고 개인적인 일에 매진하던 녀석이니 오죽하겠나.(사실 지도안 작성법을 배운 적이 없기도 하지만..) 학생들의 수업안은 정말 훌륭했다. 내용 구성이나 배치 면에서 크게 나무랄 것이 없었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고루 반영되어 있어서 수업안을 보는 것만으로 흥미로웠다. 그러나 수업자가 너무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다루려는 욕심이 수업안에 이미 드러난 경우가 많았다. 처음 수업에 임하는 사람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가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한 차시에 다루고자 과욕을 부리는 것인데, 학생들도 실제 수업시연에서 이를 통감했을 것이다. 학생들의 수업은 훌륭했다. 적당한 성량과 어조, 알맞게 구성된 발문과 고른 시선처리 등 모든 것이 훌륭했다. 물론 가상수업이기는 하나 여유로운 수업진행 역시 칭찬할 만했다.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적절하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앞으로 현장에서 실습을 통해 가다듬을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마무리


  학생들의 수업 준비와 시연을 보면서 나 역시도 함께 성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 그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기도 하지만, 반대로 완전히 새로운 발상에는 제약이 따르는 경우도 많이 보아왔다. 나 역시도 비슷한 문제를 겪을 때가 있다. 다소 정체된 스스로를 발견했을 즈음, 어린 학생들의 순수함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다. 그 과정에서 나의 부족한 면도 새로이 짚어볼 수 있었다. 반면 나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고락을 함께 했던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암흑의 전쟁터로 부하들을 이끌고 나선 무어중령과 마찬가지로, 수업에서 교사는 학생들을 미지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학습자가 수업의 주인이라고 해도, 수업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항해사로서 교사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교사가 수업에서 중심과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학생들은 귀신같이 이를 알아차리고 교사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놓아버린다. 나는 그동안 숱하게 이와 같은 ‘표류’를 경험한 바 있다. 수업에서 공동의 목표 설정과 일관된 스토리라인이 중요한 이유이다. 혹시 논의 과정에서 내가 상처가 될만한 말을 했다면 너그러이 이해해주기 바라며, 졸업 후 우연히 사회에서 만나게 되면 술한잔 사줄 용의가 있으니 꼭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바란다.  끝.



▲ 출처 : Daum영화



2014.05.2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