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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전자책과 종이책, 그리고 교육

by 라떼아범 2013. 12. 15.

디지털교과서 정책과 관련하여 새겨볼 만 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참고로 저는 디지털교과서 중앙선도요원으로서 학부모 대상 대지털교과서정책설명회와 교사 대상 연수에서 다수 강의를 하고 있는데요. 

제가 디지털교과서를 홍보하고 다니는 입장이라고 해서 무조건 디지털교과서의 장점만을 설파하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현재 디지털교과서가 가진 문제점이 있고, 기존의 서책형교과서의 장점도 엄청나게 많지요.



아래 글을 써주신 교수님과 같은 올바른 비판자들이 계시기에 디지털교과서 정책이 보다 올바른 길로 발전되어 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인간은 행동과 물리적 감각을 통해 외부를 인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이 종이책을 읽는 과정도 물리적인 지형을 탐색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종이책에 비해 전자책은 더 많은 심리적 노동을 요구한다고 한다."

"공교육에 사업이 끼어들면 배는 산이 아니라 안드로메다로 가게 된다."

"교사와 학생들의 자발성이 추진연료가 될 때 스마트 교육은 성공한다."

"전자책과 종이책은 각자의 영역을 찾아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종이책은 인간의 몸과 마음에 매우 적절한 기술이다.”


<아래는 기고문 전문>

[과학 오디세이]전자책과 종이책, 그리고 교육
조환규 | 부산대 교수·컴퓨터공학

시간이 글자로 표시되는 디지털 손목시계는 거의 사라졌다. 정확한 숫자로 찍어주는 디지털 시계보다 구식 바늘 시계를 사람들은 왜 선호할까.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시각 그 자체가 아니라 앞뒤를 고려한 상대적인 위치다. 12시에 끝나는 시험에서 11:39라는 글자보다 분침의 위치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으며, 얼마나 남아있는지, 즉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단박에 보여준다. 그래서 시곗바늘의 각도는 숫자보다 더 직관적으로 인식된다. 수정 진동자와 시침, 분침이 결합된 요즘의 시계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제대로 융합된 좋은 사례다.

책도 시계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종이책의 장점은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4만년 전 원시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 뇌에는 글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인식하는 회로가 처음부터 장착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행동과 물리적 감각을 통해 외부를 인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종이는 인간의 이런 본성에 가장 충실한 매체다. 터프대학의 인지과학자 매리엔 울프 교수에 따르면 종이책은 읽는 도중에 생각의 지도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우수한 매체라고 한다. 종이책의 귀퉁이 여백과 변하지 않는 모양은 일종의 지형과 느낌을 주기 때문에, 전체 맥락을 파악하고 이전의 기억을 되살려 내기에 전자책보다 나은 매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은 산과 들을 다니면서 물리적 지형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인간이 종이책을 읽는 과정도 물리적인 지형을 탐색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물리량이 없는 전자책을 대할 때 인간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리적 불안감을 가진다고 한다. 사람들이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책을 굳이 종이에 찍어 그것을 물리적으로 손에 쥐고 읽으려는 습관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종이책의 경우에는 읽은 양과 남은 양을 두께로 확인할 수 있어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알게 한다. 다 읽은 책의 두꺼운 두께를 다시금 확인할 때의 정신적 포만감은 전자책이 줄 수 없는 종이책만의 장점이다. 이런 물리적 쾌감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전체 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그래서 요즘은 전자책도 책장 넘기기 애니메이션이나 진행 막대 등으로 종이책을 흉내 내려 애쓰고 있다. 

스웨덴 칼스타드대학 연구팀에 의하면 종이책에 비해 전자책은 더 많은 심리적 노동을 요구한다고 한다. 전자책의 경우 내용과 더불어 조작법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중등학교에서 전자매체로 수업을 하면 선생님은 보통 교실 뒤편에 서 있게 된다. 기기로 딴 짓을 하는 학생을 감시하는 일뿐만 아니라 전자 ‘책장’을 잘 넘기지 못하거나 다른 전자 페이지에 ‘빠져 있는’ 학생을 꺼내주는 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1000여명의 부모와 아이를 대상으로 조사한 뉴욕 쿠니센터의 결과에 따르면 아이들 역시 애니메이션이나 사운드 효과가 있는 전자책보다 엄마가 읽어주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전자장치에 대한 무의식적 부담의 의미를 이 연구는 잘 보여주고 있다. 종이를 밀어내는 일은 아주 어렵다. <종이 없는 사무실의 미신>을 쓴 셀렌과 하퍼의 결론이기도 하지만 종이를 없애려면 신기술의 투입이 아니라 문화 자체를 바꿔야 한다. 책에 소개된 덴마크 한 기업의 예와 같이 구성원 사이의 칸막이를 최대한 없애고, 사장이라도 실무자에게 직접 와서 자료를 보도록 하는 정도의 문화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이면 모든 교과서가 디지털 교과서로 바뀌는 2조원대 스마트 교육이 시작된다. 소문에는 이 일을 사업으로 생각하는 퇴임 교육 관계자 일부도 있다고 하는데, 공교육에 사업이 끼어들면 배는 산이 아니라 안드로메다로 가게 된다. 스마트 교육을 성공시키려면 몇몇 외국과 같이 교장, 교감도 수업을 하는 정도의 근원적 개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초·중등학교의 행정·평가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단순히 스마트 기기를 교실에 풀어놓는 식으로는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교사와 학생들의 자발성이 추진연료가 될 때 스마트 교육은 성공한다. 79%의 학생이 이전 전자 교과서가 쓸모없다고 말한 이유에 대해 반성을 한 후 스마트 교육 시스템을 설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시계의 예와 같이 중요한 것은 두 기술의 조화다. 필자의 경우 서너 페이지 안쪽은 스크린으로 보지만 그보다 긴 문서는 종이로 본다. 중요한 메일은 반 페이지라도 종이에 찍어 줄을 쳐가면서 읽는다. 다들 비슷할 것이다. 정말로 전자책이 급한 학생은 장애 아동이듯이, 전자책과 종이책은 각자의 영역을 찾아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시간을 정해놓고 종이책을 몰아내자는 식의 무리한 진행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별 문제에 대한 적정한 기술은 지구와 인간 모두를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종이책은 인간의 몸과 마음에 매우 적절한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