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3비판서-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려비판-중 제3비판이라 불리는 [판단력비판]을 읽고 요약한 것이다. 강독 강의 중 제출한 내용을 편집하여 옮겼다.)
※ 우선 [판단력비판]에 대한 설명은 다음 위키백과의 설명을 참조하기 바란다.
==> http://ko.wikipedia.org/wiki/판단력비판
※ 김상현 역(2005)를 중심으로 백종현 역(2009)과 영문판 Werner.S 역(1987)을 참조하였다.
▲ Kant: Since I am still in one piece this must be sublime!
(이미지 출처: http://www.uri.edu/personal/szunjic/philos/subl.htm)
칸트, [판단력 비판]
제1절. 감성적인 판단력의 분석학
제2장. 숭고의 분석론
서설
§23. 미의 파전 능력에서 숭고의 판정 능력으로의 이행
미와 숭고는 양자가 모두 그 자체로 만족을 준다는 점과 반성판단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미와 숭고는 ‘그 자체로서 만족을 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즉 ‘쾌적’이나 ‘선’이 아니라 무관심한 만족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한 ‘감정적 판단’이다. 숭고 판단 역시 개념능력 일반과의 조화에서 성립하는 판단이다. 물론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의 조화이고 이는 부정적 이성개념의 현시라는 점에서는 미와 구별된다(미는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에 의한다). 이 두 가지 판단은 ‘단칭판단’이며 주관적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을 주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와 숭고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미 | 숭고 |
형식, 한정 | 몰형식, 무한정 |
성질범주와 우선적으로 관계됨 | 분량범주와 우선적으로 관계됨 |
직접적 생의 촉진감정 | 간접적 생의 촉진감정 |
상상력의 유희 | 상상력의 엄숙한 활동 |
적극적(positive) 쾌감 | 소극적(negative) 쾌감 |
합목적적 | 반목적적(부적합, 난폭, 혼돈, 무질서 등등) |
자연물 자체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 자연물 자체를 숭고하다고 할 수 없다. |
객관적 사태인 것처럼 판정됨 | 오직 마음의 숭고성을 현시하기에 적합한 대상일 뿐이라고만 말할 수 있다. |
참고: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2005) |
숭고는 무한정과 몰형식으로부터 성립하므로 비규정적 이성 개념의 현시이다. 따라서 숭고는 분량의 표상(절대적으로 큰 것)과 결부된다. 숭고는 미와 달리 오직 간접적으로만 일어나는 쾌감이며, 따라서 이 것은 일종의 감동이며, 상상력의 엄숙한 활동이다. 숭고한 것에서 느끼는 만족은 감탄이나 경외를 내포하는 쾌감, 즉 부정적 쾌감이다.
숭고와 미의 가장 중요한 내적 차이는 자연미는 합목적성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숭고의 감정을 일깨우는 것은 반목적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어떤 대상을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정당한 표현이 아니다. 본래의 숭고란 감각적 형식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성의 ‘이념’들에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즉 ‘그 대상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숭고성을 현시하기에 적당하다’고만 말할 수 있다. 숭고한 감정에 놓이려면, 우리는 미리 마음을 여러 가지 이념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자연미는 자연을 법칙들을 따르는 하나의 체계로서 표상하게 만들지만, 숭고의 이념은 오히려 자연의 혼돈과 무질서와 황폐에서 비롯된다. 숭고에 대해서는 자연의 표상에 숭고성을 끌어넣는 심적 태도에서만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즉 숭고의 이념은 자연의 합목적성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숭고를 통해서는 자연의 어떠한 특수한 형식도 표상되지 않고, 오직 자연의 표상으로부터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합목적적 사용만이 전개될 뿐이기 때문이다.
§24. 숭고 감정에 대한 연구의 구분에 대하여
숭고에 관한 만족도 감성적-반성적 판단이므로 미에 관한 만족과 마찬가지의 원리를 갖는다. (성질, 분량, 관계, 양상의 4개 범주 중) 분량에서는 보편타당한 것으로, 성질에서는 무관심한 것으로, 관계에서는 주관적 합목적성으로, 양상에서는 이 주관적 합목적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미의 분석론에서는 감성적 판단이 객관의 형식과 관계하는 것이므로 ‘성질’의 연구에서 출발했지만,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에는 몰형식성이 속하므로 이 장에서는 분량의 연구에서 출발한다.
숭고의 분석은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의 구분을 필요로 한다. 수학적 숭고는 분량과 성질의 범주에서 보아진 숭고를, 역학적 숭고는 관계와 양상의 범주에서 보아진 숭고를 말한다. 미에 대한 취미는 평정한 관조 상태의 마음을 전제하고 유지하는 데 반해, 숭고의 감정은 대상의 판정과 결부된 마음의 동요를 특징으로 한다. 이 동요는 주관적-합목적적인 것으로 판정되어야 한다. 숭고판단은 기본적으로 상상력과 이성의 결합에 의해 내려지는 판단이다. 상상력이 이성 인식과 관계하면 수학적 숭고,라 하고, 실천(욕구) 능력과 관계하면 역학적 숭고로 분류한다.
A. 수학적 숭고에 관하여
§25. 숭고의 어의
단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숭고하다고 부른다. ‘크다 magnitude’와 어떤 크기다 quantitas’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단적으로 크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크다’는 말과 같다. 이는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서 큰 것이다. 반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척도로서의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현상의 모든 크기 규정은 절대적 개념이 아닌 비교개념만 제공한다.
그런데 ‘어떤 것이 크다’고 말할 때 어떠한 객관적 척도와의 비교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교의 척도가 단지 주관적인 것에 불과할지라고 그 판단ㄴ은 보편적 동의를 요구한다.
어떤 대상에 관하여 단순히 ‘그것은 크다’고 한다면, 그 표상이 크기 평가와 관련한 우리 인식 능력들의 사용을 위해 주관적 합목적성을 가진다는 것에 관한 순전한 반성적 판단이다. 그리고 이 표상에 일종의 경외감을 결부시킨다.
‘그 것은 단적으로, 절대적으로, 모든 점에 있어서 크다’고 부른다면, 즉 ‘그것은 숭고하다’고 부른다면, 적합합한 척도를 그 것의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숭고는 오직 우리의 이념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숭고란 그것과 비교했을 때 다른 모든 것이 작은 것을 말한다.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히 전진하려고 노력하지만, 이성은 실질적 이념인 절대적 총체성을 요구한다. 그 때문에 감성계의 사물에 대한 우리의 크기 평가 능력은 이 이념에 부적합하게 된다. 이 부적합성이 우리 내부에 초감성적 능력이 있음을 느끼도록 일깨운다. 그리고 이 능력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도록 판단력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단적으로 큰 것이다.
숭고란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능가하는 어떤 마음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26. 숭고의 이념을 위해 요구되는 자연 사물의 크기 평가에 관하여
크기의 모든 논리적 평가는 수학적이다. 그러나 자연 대상들의 크기 평가는 결국은 감성적이다. 수학적인 크기 평가에 있어서는 물론 최대란 없지만, 감성적 크기 평가에 있어서는 최대가 성립한다. 그리고 이 최대가 절대적 척도로서 주관적으로는 그 이상 더 큰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정된다면, 그 최대는 숭고의 이념을 수반한다.
대상의 크기를 직관하는 데는 두 가지 작용, 즉 포착apprehensio과 포괄comprehensio aethetica이 필요하다. 포착은 무한히 진행될 수 있으나, 포괄은 포착이 진행되면 될수록 곧 그 최대 한도에 도달한다. 즉 감성적으로 최대인 크기 평가의 근본척도에 도달한다. 논리적 포괄comprehensio logica은 수적 단위로 파악되어 유한량으로 간주되지만, 감성적 포괄comprehensio aesthetica은 최대량, 즉 한계치로 표상되고 바로 여기에서 ‘절대적 크기’, 즉 숭고가 성립할 수 있다.
이성은 모든 주어진 크기에 대해 그것을 하나의 직관으로 포괄할 것과 무한한 것을 전부 주어진 것으로 (그 총체성에 있어) 생각하도록 만든다. 자연 현상의 직관이 무한성이라는 이념을 수반할 경우, 그 자연이 바로 숭고하다고 불린다. 이런 것은 크기에 대한 감성적 평가에서만 발생하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평가할 때의 우리 마음 상태가 숭고한 것으로 판정되는 것이다.
감성적 판단력은 숭고를 판정할 경우에는 상상력을 이성과 연관시킨다. 전체 상상력의 능력이 여전히 이성의 이념들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때 마음은 자신의 고유한 판정에 있어서 자신이 고양됨을 느끼게 된다.
§27. 숭고의 판정에 있어서 만족의 성질에 관하여
우리에 대해 법칙인 어떤 이념을 성취하기에는 우리의 능력이 부적합하다는 감정이 곧 존경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식 능력들의 이성적 규정이 감성의 최대 능력보다 우월함을 명백히 알게 해준다.이념이 곧 도덕성을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인간에게 있어 도덕성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숭고의 감정은 상상력과 감각적 척도도 이성에 의한 크기 평가에는 부적합함을 자각하는 불쾌의 감정이다. 그런데 이 불쾌의 감정은 우리의 초감성적 사명에 대한 감정을 일깨운다. 상상력은 절대적 총체성을 표상할 수 없고, 이 사실 자체가 상상력을 능가하는 능력(이성)이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므로 합목적적인 것이고 쾌감인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성적으로 판단하는 경우 마음은 평정한 관조에 잠겨 있으나, 숭고한 것을 표상하는 경우에는 동요됨을 느낀다. 숭고의 판정에 있어 상상력과 이성은 양자의 충돌을 통해 우리가 순수한 자립적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감정을 산출한다.
상상력의 비합목적성은 이성이념에 대해 합목적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따라서 감성적 판단 자체도 지적 포괄의 원천으로서의 이성에 대해서는 주관적으로 합목적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오직 불쾌를 매개해서만 가능한 쾌감과 더불어 숭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어떤 대상이 숭고하다고 언명하는 것은 그 대상이 이념을 대신하기에 적합한 대상임을 감성적-반성적으로 자각하였음을 언명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B. 자연의 역학적 숭고에 관하여
역학적 숭고는 관계와 양상 범주에 따른 숭고 규정을 말한다. 수학적 숭고가 대상의 양적 크기를 그 중심 계시로 삼았다면, 역학적 숭고는 대상의 위력의 크기가 관건이 된다. 대상의 위력의 크기가 무한한 것처럼 판정되는 것을 역학적 숭고라 한다.
§28. 위력으로서의 자연에 관하여
위력이란 큰 장애를 압도하는 능력을 말한다. 동일한 위력이 자체로 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의 저항에 대해서도 압도적일 경우, 그 위력은 강제력이라고 한다. 자연은, 감성적 판단에 있어서 우리에게 어떠한 강제력도 없는 위력으로 고찰된다면, 역학적으로 숭고하다.
역학적 숭고함을 판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공포와 안도감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연의 숭고를 결코 판단할 수 없다. 고난이 해소됨으로써 얻게 되는 쾌적함이란 기쁨이다.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연의 위력은 우리를 그 위력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판정하는 능력과 자연을 압도하는 우월성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자연의 위력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극복하는 힘은 인간의 이성이다. 이 능력은 자연의 위력을 우리가 굴복해야만 하는 강제력은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숭고란 자연적 존재자로서 가질 수 있는 저항력이 매우 강력한 위력을 지닌 자연대상에 비하면 무력하다는 감정(불쾌=공포)에서 그러한 위력마저 극복하고 있는 이성적-정신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신이 보존됨으로써 느끼는 감정(만족=안도감)으로 전환됨으로 성립한다. 여기에서 이성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 능력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능력의 발전과 숙련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의무로 남는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이념(이성)을 전제할 때에만, 그리고 그 이념과 관계해서만, 우리 안에 내면적 존경감을 일깨우는 이러한 존재자의 숭고성의 이념에 도달할 수 있다. 위력을 두려움 없이 판정하고 또 우리의 사명이 그러한 위력을 넘어서 있는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우리 안에 놓여 있는 능력에 의해서 오히려 더 그러한 존경감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숭고에 대한 논의는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전제로 한다. 즉 인격을 갖추고, 도덕성의 이념을 선험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인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29. 자연의 숭고에 대한 판단의 양상에 관하여
취미판단과 달리 숭고의 판단에는 쉽게 타인의 승인을 약속할 수가 없다. 감성적 판단력 뿐 아니라, 감성적 판단력을 근거 짓고 있는 인식능력들도 훨씬 더 많은 도야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숭고의 감정으로 조율되려면 이념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감수성이 필요하다. 위협적인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이성의 실천적 영역에 적합하도록 감성을 확장하여 감성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서는 심연과도 같은 무한자를 전망하게 하기 위해 이성이 감성에 행사하는 강제력이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감성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하여 상상력으로 하여금 이념을 현시할 수 있도록 강제하지만, 상상력은 노력은 하되 실패할 것이고, 때문에 그 대상은 공포스럽고 불쾌함과 동시에 이성 이념에 함당한 것이므로 매력적인 것이 된다.
자연의 숭고에 관한 판단은 도야를 필요로 하지만, 반드시 이 판단이 바로 도야에서 비로소 산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판단은 인간의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주장할 수 있고 동시에 요구할 수 있는 (실천적) 이념들에 대한 도덕적 감정의 소질에 근거하는 것이다.
여기에 숭고에 관한 타인의 판단이 우리의 판단과 합치해야 한다는 필연성의 근거가 놓여 있다. 인간에게는 도적적 감정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이 감성적 판단에 대해서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판단을 매개로 판단력을 선험적 원리들에 근거하고 있는 판단들의 집합 속에 포함시키고, 나아가 이 감성적 판단을 그와 같은 것으로서 초월철학에 끌어넣는 것이다.
2014.10.26.(일)
'Review > 철학&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나 아렌트, [칸트의 정치철학강의] 요약(5~6강) (0) | 2014.11.18 |
---|---|
한나 아렌트, [칸트의 정치철학강의] 요약(1~4강) (0) | 2014.11.18 |
칸트, 판단력비판 요약(취미판단의 제4계기) (0) | 2014.10.12 |
[책] 지식도둑의 책수집 (2) | 2014.10.01 |
칸트, 판단력비판 요약(취미판단의 제3계기) (0) | 2014.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