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의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최고의 정치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사상은 판단이론으로 수렴되는데, 매우 재밌게도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한나_아렌트
▼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Hannah_Arendt
한나 아렌트, [칸트의 정치철학강의]
제9~12강
아홉 번째 강의
전쟁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다룰 것이다. 혁명의 문제에 관한 그의 공감은 명백히 혁명과 연관된 것이지만, 전쟁의 문제에 관한 그의 공감은 명백히 평화와 연관되어 있다.
칸트는 인류의 행적과 역사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일어난 전쟁에 대한 그의 의견을 <판단력 비판>에서 인상적으로 진술하였다. 그는 전쟁 자체는 숭고한 어떤 것을 그 안에 갖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미학적 성격을 가진) 관찰자의 판단이다. 분명 자연의 “최종계획”은 “세계시민적 전체, 즉 서로에 대해 파괴적으로 행위할 위험이 있는 모든 국가들의 체계”이다. 그러나 전쟁이 인류를 찾아올 때 가져오는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여전히 문화에 기여하도록 모든 재능을 최고조로 발전시키는 동기가 된다. 전쟁은 전제군주제의 무기력처럼 치유 불가능한 정도로 나쁜 것은 아니고, 민족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갈등과 마찬가지로 진보의 추진력이다.
행위자와 관련하여서는 반대의 입장이 도출된다. 미학적이고 반성적인 판단의 통찰은 행위를 위한 실천적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 내부에 있는 도덕실천적 이성은 전쟁은 없도록 하라는 참을 수 없는 거부를 선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준칙들이 미학적 반성적 판단을 파기하지는 않는다. 비록 칸트가 평화를 위하여 행동(행위자 입장)해왔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력(관찰자 입장)에 대해 알고 있었고 또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다.
칸트는 두 개의 아주 상이한 요소를 제시한다. 첫째 관찰자의 입장이다. 그에게는 목격한 것이 가장 중요하며, 사건이 일어나는 행도에 담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의미를 행위자는 무시한다. 이러한 통찰은 관찰자의 무관심성, 비참여, 비관여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의 우화>에서는 “인생에서 노예적인 사람은 명성(doxa)과 소득을 추구하지만, 철학자는 진리를 추구한다.”라고 하였다. 오직 관찰자만이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이고, 행위자가 관여하는 것은 명성(doxa), 즉 타인의 의견이라는 것이다. 행위자는 자율적이지 않고, 관찰자가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 행동한다. 따라서 관찰자의 기준이 자율적이다.
둘째 진보의 관점이다. 즉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사람들이 판단할 때 의존하는 기준이 되는 진보의 관념이다. 그리스의 관찰자는 개별적 사건을 전체가 아닌 개별사건, 특정 행동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 자체의 방식대로 그 조화(cosmos)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그 진리를 발견)한다. 역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진보는 이야기의 의미가 그 종국에 가서야 드러난다는 오랜 원리를 역전시킨다. 칸트에게서 이야기나 사건의 중요성은 그 종국에 존재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존재한다. 프랑스혁명이 중요한 것은 미래세대에 대해 주는 희망 때문이다.
세계사의 주체에 대한 헤겔과 칸트의 견해에는 차이가 있다. 헤겔에게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이며, 이 드러내는 최종단계에서 철학자가 이해하는 것도 바로 절대정신이다. 더욱이 헤겔에게 절대정신의 계시는 종말에 다다른다.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절대정신이다.
반면 칸트에게서 진보는 항구적이다. 역사에는 결코 종말이 없다. 칸트에게서 세계사에 걸맞은 주체는 인류이다. 자연의 계획은 인류의 모든 능력을 계발시키는 것이다. 인류는 무한(비결정성)을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세대 전체를 의미한다. 그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는 것은 개별 구성원이 아니라, 단지 인류(species)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역사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내장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도덕철학의 중심에는 개인이 존재하고, 역사철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종, 즉 인류의 영원한 진보가 존립한다. “세계시민” 또는 “세계관찰자”의 관점을 가진 관찰자는, 전체에 대한 관념을 가짐으로써 어떤 단일한 특정 사건 속에서 진보가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자이다.
열 번째 강의
단수(the singular)로서의 관찰자는, 한 사람의 관찰자가 많은 행위자를 바라볼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과 관조적 삶의 방식은 다수에서 물러나옴을 전제한다는 이유에서 비롯된다. 관조는 고독 소에서 수행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행위는 고독이나 고립 속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이 두 가지 삶의 방식, 즉 정치적(활동적) 방식과 철학적(관조적) 방식의 구별이 상호배타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될 때, 무엇이 행위를 위한 최상의 것인지를 아는 사람과 그의 안내 또는 명령에 따라 그것을 수행하려는 다른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구별될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정치가(Statesman)>의 요지이다. 여기에서 이상적인 통치자는 전혀 행위하지 않는다.
반면 칸트에게서 공공성은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선험적 원리”이다. 자신의 목적에 모순을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공공성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간에 정치와 권리를 결합한 행위임을 기억해야 한다. 행위와 단순한 판단 또는 관조나 인식에 대해 칸트는 플라톤과 동일한 개념을 가질 수 없다.
관조와 행위의 차이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개념은 실천이성에 의해 결정된다. “관조적 기쁨(contemplative pleasure)”과 “비행위적 기쁨(inactive pleasure)”에서 나타나는 판단은 실천개념과 상관이 없다. 실천적 문제에서는 판단이 아니라 의지가 결정적이며, 이 의지는 오로지 이성의 준칙에서 도출된다. 칸트에게 실천적이라는 말은 도덕적임을 의미하며, 개인을 개인 자체로서 관계하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이라는 개별적 사건을 위해 적절한 공적 영역을 구성하는 것은 행위자가 아니라 갈채를 보내는 관중들이었다.
미적 판단에 관한 논의에서 칸트는 천재(genius)와 취미(taste)를 구분한다. 미적 대상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취미가 필요하고, 그의 생산을 위해서는 천재가 필요하다. 천재는 생산적인 상상력과 독창성의 문제이며, 취미는 단지 판단의 문제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그것은 천재성이다. 칸트는 미적 예술을 위해서는 상상력, 지성, 영혼, 취미가 필수적이라고 했는데, 앞의 세 기능은 네 번째 기능-취미 즉 판단-에 의해 연합된다고 하였다. 미적 대상의 경험을 위한 필수조건은 소통가능성인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천재의 적절한 과업이다. 이러한 소통가능성을 이끄는 기능은 취미이며, 취미 또는 판단은 천재의 특권이 아니다. 관찰자의 판단은 미적 대상이 등장하는 데 전제가 되는 공간(공적 영역)을 창조한다. 예술가의 독창성(행위자의 고결함)은 예술가(행위자)가 아닌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 달려 있다. 행위자와 관찰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판단력이다.
우리로 하여금 관찰자들처럼 판단하게 하는 것이 공통감각(common sense)이다. 반대로 의사소통 없이 논리적 기능으로서의 사적 감각(sensus privatus)이 있다. 칸트는 우리가 관찰자들처럼 판단하게 하는 것이 공통감각이고, 공통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이 광기라고 보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분간하는 기능인 공통감각은 취미(taste)에 기초한다. 우리의 오감 중 시각, 청각, 촉각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즉 객관적으로 다룸으로써 쉽게 소통 가능하다. 반면 후각, 미각은 전적으로 사적이고 소통가능하지 않으며, 단지 분간을 담당하는 차별적 감각(discriminatory)일 뿐이다. 세 가지 객관적 감각은 재현(representation)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한다.
그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객관적 감각대상을 “감각된”대상으로 , 마치 그들이 내적 감각의 대상인 것처럼 변형시킨다. 이 것은 대상에 대하여가 아니라 그것의 재현과정을 잔성함으로써 발생한다. 재현된 대상은 직접적 대상지각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쾌와 불쾌를 유발한다. 칸트는 이를 “반성작용(tthe peration of reflection)”이라 부른다.
열한 번째 강의
미각과 후각은 감각들 중 가장 사적이며, 재현(representation)할 수 없고, 쾌와 불쾌를 직접적이고 압도적으로 나타낸다. 이들은 주관적인 내적 감각(inner senses)이다. 칸트가 “입맛(취미)의 문제에 대하여는 논쟁할 수 없다.”고 밝혔듯이, 미각(취미) 문제가 곤란한 이유는 그 것이 소통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수수계끼들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두 기능, 즉 상상력과 공통감각이다. 칸트는 “판단하는 바로 그 행위 가운데 쾌감을 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다. 미는 재현작용(representstsion) 속에서 쾌감을 준다. 내가 그것에 대하여 비로소 반성할 수 있도록 상상력이 준비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성작용”이다. 재현작용에 의해 적절한 공간, 거리, 비관여 또는 무관심성, 즉 어떤 것에 대한 승인과 불승인을 위한, 그래서 그것의 적저란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이루어진다.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불편부당성(impatiality)를 획득한다.
칸트에 의하면 가장 사적이고 주관적인 감각인 것처럼 보이는 감각 속에서 주관적이지 않은 어떤 것(공통감각)이 있다. 취미판단은 항상 타인과 타인의 취미를 반성하는 가운데,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가능한 판단들을 고려하게 된다. 이는 내가 인간이고 인간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판단하는 것이지, 초감각적인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들(인간)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것이지, 인식기관(이성)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판단과 취미의 기본적인 타자지향성은 감각 자체의 본질, 즉 절대적 개성 중심적 특성에 가장 강력하게 대립한다.
열두 번째 강의
판단에는 두 가지 정신적 작용이 이루어진다.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 현존하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재현할 때, 대상을 현실적 대상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닫는다. 취미(미각)라는 감각은 자기 자신을 감각하는 내적 감각이며, 이러한 상상력은 반성작용의 대상을 준비한다. 이 두 번째 작용인 반성작용이 무엇을 판단하는 실제적 행위이다.
이러한 이중적 작용은 모든 판단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인 “무관심적 기쁨”, 즉 불편부당성의 조건을 형성한다. 자신의 눈을 감음으로써 사람은 가시적 사물들에 대한 불편부당한 관찰자가 되어, 마음의 눈으로 전체를 보는 입장에 서게 된다. 반면 행위자는 자신의 역할만을 알고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반성이 작용하게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상상력의 작용은 부재한 것을 즉각적으로 내적 감각에 현재화시키는 것인데, 이 내적 감각은 정의상 차별적(discriminatory)이다. 내적 감각은 나를 즐겁게 하는지 또는 불쾌하게 하는지 취미와 마찬가지로 선택하는데, “승인과 불승인”을 받게 된다. 모든 승인과 불승인은 그 일이 지나간 후에 일어나는 생각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기쁨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승인과 불승인 사이에서 선택하는가이다. 기준은 소통가능성 혹은 공공성이다.
2014.12.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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