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2016 독일vs.이탈리아 경기를 보고>
— 어느 이탈리아 축구팬의 넋두리.
독일 vs. 이탈리아 = 커쇼 vs. 범가너
#1.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두 도시를 연고로 하는 LA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자이언츠는 MLB를 대표하는 전통적 라이벌 관계로도 유명하다. 특히 클레이튼 커쇼와 매디슨 범가너라는 걸출한 좌완에이스의 맞대결은 늘 모든 야구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미지 출처: http://koreanhl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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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쇼는 말이 필요없는 ‘우주최강’의 선발투수로 불린다. 강력한 패스트볼과 완벽한 변화구컨트롤로 어린 나이(88년생)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 번의 사이영상과 한 번의 MVP도 일궈내는 등 역대급 활약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질없는 걱정이 커쇼걱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진할 때에도 어느새 자신의 평균스탯을 되찾는 선수가 바로 커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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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가너 역시 MLB를 대표하는 투수임에는 틀림 없으나, 투수로서의 능력만으로는 역시 커쇼에 비하지 못한다. 하지만 범가너는 웬만한 타자들에 버금가는 타격능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해 5홈런(통산 12홈런)을 기록했고, 심지어 만루홈런을 쳐낸 적도 있다. 범가너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이다. 통산 0점대 방어율로 큰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2010년대 들어 짝수해(2010, 2012, 2014)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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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들의 맞대결은 늘 흥미진진하다. 올해도 한 차례 맞대결이 있었는데, 이들을 보기 위해 다저스타디움에는 5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한 바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객관적 실력에서 앞서는 것으로 평가받는 커쇼가 범가너에게는 유독 약했었다는 것이다. 범가너는 커쇼만 만나면 승승장구할 뿐 아니라, 그로부터 두차례의 홈런을 뽑아낼만큼 맹타를 휘둘렀다. 이쯤 되면 커쇼의 천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2.
이번 유로2016에서 내가 응원하는 이탈리아와 강팀 독일의 경기는 흡사 범가너와 커쇼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누구나 눈치챌 수 있듯이 독일은 커쇼, 이탈리아는 범가너에 비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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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선수들 개인 능력은 물론 전술적 측면(여러모로 바이에른 뮌헨을 바탕으로 한다는) 모두에서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다. 지난 2014브라질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한 이래로 계속 승승장구 중일 뿐 아니라, 토너먼트에서 특히 강한 면모 역시 독일에게 기대를 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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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탈리아는 전통의 강호답지 않은 스쿼드로 당초부터 역대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멤버 면면을 보더라도 딱히 알만한 선수가 없다. 그러나 스타플레이어가 없다는 약점이 오히려 팀을 하나로 만들고 조직력을 극대화시킨 힘이 된 듯 하다. 바로 이전 16강전에서 스페인을 상대하며 보여준 그들의 경기력은 과히 이번 대회 최고 수준이었다.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전개하는 빠른 역습과 정확한 마무리는 그 어느 팀도 두려워 할만 했다. 대체로 약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이기도 하지만, 선수들 개인의 출중한 기본기와 전술적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처럼 완벽한 경기력이 발휘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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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독일을 보고 있자면 마치 커쇼를 보는 것 같다. 너무나 완벽해서 경외감마저 들지만, 그점 때문에 왠지 선뜻 정을 주기는 싫은 그런(커쇼에게는 미안..).. 독일의 지난 월드컵 우승 당시에도 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과 함께 슬퍼했었으니까(돈크라이포미 알젠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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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응원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특히 이번처럼 갖고 있는 모든 힘을 최대한 끌어모아내는 모습에서 나같은 마이너매니아는 심장이 뛴다. 이런 팀이 강자를 눌러버리는 그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월드컵과 유로대회 등 메이져대회에서 이탈리아가 독일에게 패한 적 없다는 기록 또한 낭만적 스토리를 기대하게 해준다. 마치 한 살 동생 범가너가 최강자 커쇼를 살짝 즈려밟아주듯 말이다.ㅎㅎ
#3.
두 팀의 경기는 역시 명승부였다. 여전히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부폰과 거의 완성된 하나의 팀으로서의 이탈리아. 그리고 역시나 최강팀으로서의 독일. 30프로대의 낮은 점유율에서도 한번의 역습찬스에서는 어떻게든 끝내 슈팅까지 연결하고 후퇴할 시간을 버는 이탈리아의 계산된 플레이. 높은 점유율과 정확한 패스를 바탕으로 쓰리백과 포백을 넘나들며 상대의 견고한 수비를 허물어내는 독일의 집요함과 전술적 완성도. 실점 이후 더욱 강력한 압박과 역습으로 즉시 만회골을 만들어내는 이탈리아의 투지. 마지막 승부차기 대결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승리를 일궈내는 독일의 침착함. 모든 것이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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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나의 기대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여전히 강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독일은 더 강했고 영리하기까지 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며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강자가 모두 간파한다면, 승자는 결국 강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만회골을 넣을 때만 해도 이탈리아에게 행운이 따르는 듯 싶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승리의 여신은 약자의 문도 두들기지만 대신 그로부터는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냉정한 법이니까.
개인적으로는 후반 중반 이후 스투라로와 데 실리오, 파롤로의 옐로카드가 연이어 터져나오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탈리아의 패배를 직감했었다. 이미 많은 선수가 카드트러블에 처한 상황에서 점차 자신들의 플레이를 잃어가는 징후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추가실점 없이 승부차기까지 끌고 간 것이 이탈리아의 저력이었다. 참고로 승부차기 경기는 무승부로 기록하기에, 이탈리아의 메이져대회에서의 독일 상대 무패기록은 당분간 지속된다.ㅎ
#4.
올 시즌 범가너와 커쇼의 대결이 한 차례 정도는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꼭 범가너가 커쇼의 공을 담장 밖으로 걷어내 이탈리아의 한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ㅋㅋ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2016.07.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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