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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작품

[영화] 친구가 쓰는 영화평: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by 라떼아범 2017. 2. 3.

[영화]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친구가 쓰는 영화평.




“최고의 감동실화”
이 흔한 문구. 사람들은 '감동'을 참 좋아하니까. 감동을 느끼면 대체로 '만족'스럽고, 그 작품은 대체로 '좋은' 작품으로 인정하는 게 우리의 정서다.


그런데 이 감동이란 게 대체 어떤 감정상태를 말하는지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말로 표현하려면 더욱 어려울 것 같다. 사전에는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임"이라고 나오는데, 영어 moving과 찰떡같이 어울린다. 그렇다고 바로 이해되는 건 아니다.


이 감동의 정체를 좀더 생각해보면, '슬픔', '고통', '기쁨' 등의 감정으로부터 파생하는 2차감정의 한 형태가 아닌가 싶다. 깊이 느껴 움직이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일단 그 ‘느낌’이 무언지 알아야 하고, 후보군에 저 세 감정을 생각해 본 것이다. 움직이는 마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파토스(pathos)’로 대충 이해해보련다. 움직이다(move)를 좌표의 이동으로 이해하면 편리해 보인다. 그러니 공감도 되고 설득도 되고 그러는 걸로.. 대충 일종의 평정심(peace of mind)과 반대에 있는 어떤 상태(dynamic state?)으로 이해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저 세 감정의 다른 말로서 좀 더 폼나게 감동이라 퉁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내가 무슨 심리학자도 아니고 감동을 분석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며 자연스레 감동이란 무얼까 생각해봤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는 난 이 영화를 보며 전혀 감동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이야기인데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그렇지 좀 뚱딴지 같긴 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사실이다.


지난 달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려봤다. 내가 느낀 감정은 할머니의 부재를 맞닥뜨림으로써 비롯된 아픔과 슬픔이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느끼셨을 감정을 공감하며 더 큰 아픔과 슬픔이 찾아왔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감동은 자리할 틈이 없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이미 많은 관객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소리 내어 우는 여자관객도 몇 분 보였다. 아마도 슬픔 또는 감동 때문이었겠지. 희망을 노래한 영화였지만 결국은 비극이었고, 이미 그 비극을 알고 있었지만 희망을 노래한 그로부터 '감동'을 받았으리라.


그런데 나는 그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나에겐 이 영화가 너무도 현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못 본지 이제 6년 반이 되어가는 동안 거의 잊고 살았던 친구 윤혁이다. 그런데도 스크린에 비춰진 모습은 그때 모습 그대로이고, 내 기억도 여전하더라. 윤혁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나에게는 그저 윤혁이의 모습이었다. 영화를 보며 어떤 영화적 상상력도 동원할 필요가 없이 난 결말을 알고 있었다. 굳이 어떤 헛된 희망을 꿈꿀 필요도 없었다. 내가 다 알고 있던 이야기이고, 익숙한 친구의 모습이었다. 두드러지는 의젓하고 결연한 모습, 가끔 보이는 장난스럽고 단무지 같은 모습.. 이거 다 이 친구 그대로 옮겨놓았더라.


그래서 더 좋았다. 애써 감동 받을 필요도, 무언가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익숙한 친구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 기쁘고 좋았다. 영화가 끝날 무렵 마치 친구와 다시 이별하는 것 같아 초조하고 슬프고 아팠다. 기쁨과 슬픔과 아픔이 이렇게 교차한다.


정리를 해야겠다. 많은 분이 이 영화를 봐주기 바란다. 이 영화를 통해 희망을 찾고 감동을 느끼는 것도 좋다. 시사회 영상에서도 관객들은 대체로 희망과 감동을 이야기 했다. 둘 다 매우 훌륭한 가치인 건 분명하다.


그런데 난 다른 걸 바란다. 많은 이가 윤혁이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결코 나와 똑같이 영화를 보고 느낄 수는 없겠지만, 한 사람으로 남자로 친구로 그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화면에 보여진 모습 그대로면 족하다. 누군가 기억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7.02.0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