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피곤해서 경기를 안 보려다가 메시의 Last Dance 만큼은 그래도 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 퇴근과 동시에 TV 앞에 앉았다. 상대는 이번 월드컵에서 최약체군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아시아팀 사우디아라비아. 지난 경기에서 카타르와 이란이 너무 실망스런 경기를 보여준 탓에 이번 경기에선 또 얼마나 충격적인 결과가 나올지 시작 전부터 걱정이 들었다. 물론 나는 90년 이태리월드컵부터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를 애정했던 사람이지만, 오늘 경기만큼은 심정적으로 사우디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 해설
이번 지상파3사의 해설진은 어제와 약간 달랐다. KBS는 남현종, 한준희, 조원희. MBC는 어제 이란 경기와 같은 김성주, 안정환, 서형욱. SBS는 특이하게도(?) 배성제, 박지성, 이승우였다. MBC는 어제 이란전과 같은 해설진이었기 때문에 바로 채널을 돌렸다. 나는 선수시절 안정환을 참 좋아했지만, 해설자 안정환은 내 취향이 아니니까.
SBS에서 처음 영입한 이승우가 궁금해서 몇 분간 들어봤다. 생각보다 안정된 음색과 톤이 인상적이다. SBS가 아무리 모험적이라 해도 나름 검증을 거쳤을테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겠지만 의외(?)로 괜찮다는 생각이다. 본인이 현역 선수라서 그런지 박지성과 역할을 나눈 것인지 모르지만 전술 설명을 자주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이상은 없었다. 놀라운 것은 박지성이었는데, 역할을 나눌 전문 해설자(어제는 장지연)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어제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마이크를 잡는 모습이었다. 선수정보, 전술, 순간순간 상활 등을 주도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동안 내가 알던 박지성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시 아쉬운 건 그 특유의 음색이었다. 그저 인지도를 따라 해설자를 급조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SBS를 계속 볼 생각은 없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송사는 남현종 캐스터와 한준희, 조원희 해설위원이 호흡을 맞춘 KBS였다. 남현종 캐스터는 목소리는 낯이 익은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얼핏 들으면 이광용인가 싶을 정도로 음색과 톤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한준희야 예나 지금이나 방대한 지식을 잘 풀어놓는다. 예능감과 특유의 ‘명언병’도 여전하다. 조원희는 유튜브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해설도 평균 이상 할 것으로 예상했다. 역시 그렇다. 수비수 출신답게 수비와 오프사이드 전술에 대한 설명이 좋았다. 한준희와 조원희의 케미도 신기(?)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조원희가 한준희 눈치를 보는 느낌? 또는 한준희가 조원희를 칭찬하고, 이에 조원희가 고마움을 표하는 것과 같은 시추에이션을 말한다. 구자철이나 박지성과 달리 조원희의 띠엄띠엄한 이미지가 갖는 장점이 아닌가 싶다. 그걸 생각하고 둘을 짝맞췄다면 기획한 사람에게 상줘야 한다.
- 경기 감상
원래 그냥 해설진에 대한 감상만 적을 생각이었는데, 오늘 경기는 너무 역대급 결과였기 때문에 감상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모처럼 감정이입 제대로 하고 사우디를 응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도 조별리그 세 번째 경기에서 역대급 강호 포르투갈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사우디가 선전해주길 바랐다.
이번 KBS 해설의 재밌는 기획 중 하나는 경기때마다 해설위원들의 결과예측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모든 해설자는 0:3에서 0:4까지 사우디의 대패를 예상했다. 한준희만 1:4 패배를 예상했는데, 같은 아시아 국가로서 한 골을 넣어주길 기대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상대가 A매치 37경기 무패를 기록 중인 아르헨이니 이런 예상은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특히 사우디는 예전에 독일에게 0:8 대패한 적도 있었으니 이란보다 더 약체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왠일. 오늘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일단 소속팀에서 후보라는 골키퍼는 몸이 너무 가볍고, 나올 때 말 때 순간판단 너무 지렸더라. 어떤 때는 페널티박스 밖까지 나와서 스위퍼 역할도 잘하고, 패스도 뛰어난 것이 아닌가. 수비진의 짜임새도 기가 막혔다. 마치 줄자를 서로의 몸에 연결하고 뛰어다니듯 수비라인을 지키다니. 5백에서 7백까지 유기적으로 바꿔가면서 압박이 필요할 땐 한두 명이 미드필더 라인까지 나왔다가 어느새 자기 자리로 복귀하기를 90분 내내 해내버린다. 3선의 폭도 오밀조밀하게 잘 지키니 메시가 됐든 디마리아가 됐든 마음 놓고 뛰어다닐 공간을 찾지 못할 수밖에. 9명의 선수가 한 팀에서 뛴다더니 조직력이 참 대단했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한 것은 개인기와 체력이였다고 생각한다. 사우디 선수들이 본래 아시아에서는 개인기가 좋은 편이었는데, 이 정도인 줄을 몰랐다. 선수들이 아르헨 선수들 앞에서 전혀 쫄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시종일관 꾸준히 상대를 압박하려면 무엇보다 체력이 받쳐줘야 하는데, 사우디 선수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상대가 피지컬 괴물이 즐비한 잉글랜드가 아니라 아르헨이란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물론 사우디 선수들의 피지컬이 예전에 비해 좋아진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운도 따라줬다. 첫골과 마지막 골키퍼의 엘로카드는 심판이 다소 편파적이었다고 생각이 들지만, 이번 대회에 처음 도입된 반자동 오프사이드 시스템의 덕을 톡톡히 봤다. 이게 아니었으면 어쩌면 두어 골을 더 허용하고 대패했을지 모르는데, 잇달아 골이 취소되면서 후반에 반격할 바탕이 마련됐다. 만약 그중 한 골이라도 허용됐다면 후반에 급격하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기하는 걸 보니 아르헨은 그렇게 강한 것 같지 않다. 사우디의 의도된 오프사이드 트랩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것도 어쨌든 아르헨의 실력일테니까. 이란이 운이 나빴다.
이 팀을 이 경지에 이르게 한 감독도 대단하고,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팀을 지켜낸 조직력과 몇 차례 없던 찬스를 높은 확률로 성공시킨 두 득점자도 놀랍다. 한달 간 손발을 맞췄다던데 그 결실을 오늘 이룬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도 딱 이렇게만 하면 포르투갈이든 우루과이든 해볼 만할텐데. 벤투 듣고 있을까?
월드컵 안 보려 했는데, 덴마크:튀니지 비슷한 팀끼리 서로 치고 박으니 이렇게 재밌네. 이제 자려다가 레반돞 경기 기다리다가 또 끄적여봤다.
2022.11.23.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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