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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철학&문학

[책] '가르칠 수 있는 용기’를 읽고

by 라떼아범 2014. 4. 16.

'가르칠 수 있는 용기’를 읽고




가르칠 수 있는 용기 1,2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은 무척 독특한 분이셨다. 그 당시 미술과목은 일주일에 2시간만 배정되어 있었는데,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분은 늘 첫번째 시간은 미술과는 아무 상관없는 듯한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된 사람’과 ‘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학과 자만은 무엇인가? 보통 이런 식의 주제를 다루셨는데, 차라리 철학이나 윤리학 수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것 같았다. 어차피 미술 실습은 귀찮고, 시험이야 바싹 준비해서 치르면 그만인 것이었기에 다들 문제될 것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그동안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그 수업이 무척 좋았다. 그렇다고 선생님께서 미술 자체를 소홀히 하신 것도 아니다. 그 분께서는 개인전도 수차례 치르셨을 뿐 아니라, 충청북도 미술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실력과 인격을 두루 갖춘 분이셨다. 학교 곳곳에 그 분의 작품이 걸려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본인께서 까먹은(?) 미술시간을 보충하시려는 듯 작품을 제작 시기가 도래하면 엄청난 카리스마로 학생들을 압박하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를 읽으며 처음 떠오른 선생님을 소개해보았다. 나는 사실 이 책이 잘 읽혀지지 않았다. 결코 책이 어렵다거나 생소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가 아니다. 불편했기 때문이다. 우선 제목을 보자.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니. 가르치는 데 무슨 용기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래 한 발 물러나 생각해보자. 나도 교단에서 아이들을 지도해봤고 수업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어려운 주제를 가르쳐야 할 때 약간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다. 초년 시절 공개수업은 언제나 껄끄러운 일이다.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난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책은 보다 본질적인 곳을 건드린다.
  저자는 훌륭한 가르침은 교사의 정체성과 성실성에서 나오며, 하나의 테크닉으로 격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난 몇년 간을 되돌아보자. 나는 젊은 교사의 최대 장점이라고 하는 잡다한 기술들을 연마해오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것이 마치 훌륭한 교사의 보증수표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은 바로 테크닉이었다.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가르칠까 골몰하고, 학생들을 보다 잘 통제하고, 학부모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한 테크닉을 연마해왔던 것이다. 나는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별 어려움이 없었으니까. 사실 잘 생각해보면 나는 개인으로서의 나와 교사로서의 나를 분리하려 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남들이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마치 무대에 오른 연기자처럼 교사로서의 나는 점점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갔다. 이 책은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과연 나의 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가. 나의 소명에 성실하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생물학자 매클린톡의 사례는 큰 울림을 준다. 어떤 지식이든 관계적인 것이고, 지식은 인식 대상과 깊은 일체감을 이루려는 욕망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다. 지식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일체감을 이루는 존재방식인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연구대상(옥수수)을 객관화하지 않았고, 그것을 분석하여 데이터로 만든다는 교과서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지도 않았다. 결국 완벽한 이해란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 것이 나에게 건내는 말을 받아들이려는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서 존경과 사랑으로 대할 때 비로소 훌륭한 교육도 가능한 것이다.
  그동안 훌륭한 가르침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던가. 그저 남들과의 경쟁에서 한발짝이라도 앞서기 위해 골몰했던 것은 아닌지 지난 여정을 곱씹어보자. 내가 배워야했던 지식과 가르치는 교과, 만나는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동료교사들에 대해 나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타자를 존경과 사랑으로 대할 때 분열된 자아를 극복하고 완벽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오래 전 나에게 큰 스승이었던 미술선생님과의 추억을 한가지 더 소개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유독 장난이 심했던 나는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던 직경 3cm 가량의 돌멩이를 발로 차 현관유리에 구멍을 낸 적이 있다. 당연히 사건전말은 교무실로 보고되었고, 나는 그 미술선생님(교무부장님이셨다.)의 손에 이끌려 교장 선생님 앞에 서기에 이른다. 부임하신지 얼마 안된 교장선생님께서 이 부도덕한 1학년 녀석의 소행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무척 긴장하고 있던 찰나, 미술선생님께서 호랑이같은 얼룰로 나를 나무라기 시작하셨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아본 사람들은 그 때의 내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꾸지람에 그만 나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보고 계시던 교장선생님께서 미술선생님을 말리신 뒤에야 상황은 종료되었다. "정선생~ 그만해도 되겠네. 녀석이 혼이 쏙 빠졌구만. 허허” 그러나 교장실을 나오자 마자 선생님께서는 나를 꼬옥 안아주시며, “미안하다. 큰아빠가 너를 너무 세게 혼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만난 것이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 3,4,5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철학이라는 교과를 접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철학이라는 대상은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는, 대학에서도 좀 이상한 사람들이 하는 그런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있는 그 수업이 무척 지루했었다. 쓸데 없는 주제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극단적 논리를 펴는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반에서 철학수업을 열심히 듣는 친구가 있었는데, 현수란 녀석은 한 학기 내내 두꺼운 철학서적을 한쪽 손에 들고 다닐 정도로 '특이한; 녀석이었다. 그 책의 제목은 철학사통론(?)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 현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상한 아이가 되었다.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대학에 진학한 이후였다. 정확히는 몇권의 사회서적을 읽고 나서 세상의 구조와 논리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했던 지식들(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점수라는 한가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무조건 이해하고 암기해야 했던)의 바탕에는 “왜”라는 질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우선 동서양철학사를 읽고, 관심이 가는 몇몇 철학자의 원저(번역서)와 해설서 등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공부를 하든 그 바탕에 있는 철학을 먼저 검토해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대체 무엇이 철학에 대한 나의 태도를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시킨 것일까? 나는 이 책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았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는 어떤 철학적 사유나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고등학생들은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대학입시라는 대명제 앞에서 철학적 고민이란 무가치한 것이거나 일종의 사치로 여겨질 소지가 높다. 철학(혹은 윤리/도덕과 같은 과목도)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조차 교과를 일종의 ‘지식’으로만 여기고 거의 주입시키는 방식을 선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지적한 '인식의 객관론 신화'가 가장 사유적이고 도전적이어야 할 철학교과에서조차 힘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더 철학은 우리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고, 철학이 마땅히 서있어야 할 자리를 지금은 가벼운 처세술책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등학교 시절 인생의 가장 큰 갈림길에서 거친 파도 속에서 씨름하는 학생들의 물음에 답해주었어야 할 철학교과의 변절이 슬픈 이유다.
  그런데 나는 왜 대학생이 되어 철학책을 펼치게 된 것일까? 바로 철학이란 것이 위대한 사물로서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식경쟁의 링위에서 마주친 철학이 아니라,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답해주는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철학은 정복해야할 대상이 아니었다. 이해하면 할 수록 더 이해하고 싶은, 함께 할수록 나와 일체가 되어가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철학공부와 함께 성장해가는 내가 좋았다. DNA의 이중나선형을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이 그깟 분자 앞에서 예의 거만함을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위대한 사물에 대한 은총 덕분이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은 늘 도전이다.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은 교과내용을 일종의 객관적 지식으로 여긴다. 그것은 학생들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이제껏 주입식 교육과 경쟁적 입시체제가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사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에 그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이는 과외선생님이나 학원선생님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좋은 수업이란 학생과 교사가 함께 성장하는 수업이라고 이야기 한다. 지식을 객관화하고 학생을 오로지 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좋은 수업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교사 역시 학생으로부터 배우고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위대한 사물을 중심으로 진리의 커뮤니티를 구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에게 단지 시험성적을 잘 받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인식하고 강력한 지적호기심과 동기를 통해 학습에 참여하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철학이란 멋진 학문을 모르고 있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2014.04.16.(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