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사회&문화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 도서관]을 가다.

by 라떼아범 2015. 2. 15.

(휴일을 맞아 파주 출판도시에 위치한 [지혜의 숲 도서관]을 찾았다. 보고 느낀 것을 적는다.)


지혜의 숩 도서관을 가다.


드디어 왔다. 파주 출판도시에 위치한 지혜의숲 도서관이다. 지난 해 건립되었고, 그 특별함 때문에 제법 유명해진 곳이다.


▲바깥 모습은 여기가 도서관인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특별한지 한번 살펴보자.

  우선 책 검색대가 없다. 그리고 책들도 예의 분류방식으로 나뉘어 정렬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손에 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눈팅하다 꽂힌 책이 있거든 그냥 아무 것이나 붙잡고 읽는 수밖에 없다. 물론 나름 잘 알려진 책이나 특정 출판사에서 모아놓은 전집 같은 형태의 책들은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책장이 엄청나게 높다. 대충 어림 잡아도 2층 천장 높이, 그러니까 못해도 6-7미터는 되어 보인다. 저 꼭대기에 있는 책들은 일단 내 시력으로는 무엇인지 분간도 어렵다. 순간 서양의 어떤 대학 도서관의 책장을 떠올려본다. 그런데 그 광경을 찍어놓은 사진에서는 높은 사다리도 가끔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 책들은 색인을 통해 찾아볼 수 있게 정리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도서관에서는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계단이나 사다리 따위를 찾을 수 없다. 결국 저 책들은 읽으라고 가져다 놓은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래도 꼭 꺼내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면 뭔가 방법은 있지 않겠는가.ㅎ


▲이탈리아 안젤리카 도서관 - 높은 책장과 사다리를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http://www.atlasobscura.com/articles/librophiliac-love-letter-revised-edition)


  마지막으로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조용함’을 기대해선 안 된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곳은 도서관보다는 관광지나 실내공원(약간의 과장)이란 이름이 더 어울릴만큼 소란스럽다.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둘째 치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것 정도는 예사다. 심지어 뛰어다니는 아이들에, 바로 옆에서는 먹을 것을 팔기까지 한다. 이곳은 분명 이상한 곳이다. 



  책은 아무 것이나 가져다 아무 데서나 읽으면 된다. 다 읽은 후 제자리에 돌려놓기만 하면 그만이다. 앉을 곳이 충분한 편은 아니지만, 드나드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관람자(도서관을 보러 온)들이기에 웬만해선 자리가 없어 발길을 돌릴 일은 없어 보인다. 



  이런 특징들은 애초에 언론에 일찌감치 알려져 네티즌들의 갑론을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도서관 본연의 기능을 망각한 보여주기 식의 다름 아니라는 폄훼와 냉소를 보내기도 한 반면, 이 새로운 시도를 책을 매개로 한 새로운 문화공간의 탄생으로 받아들이며 기대감을 내비치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나는 후자 편에 속한다. 그래서 늦었지만 직접 이곳을 찾은 것이기도 하다.



책장은 도서관의 구조에 따라 알맞게 그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세계문학전집(민음사)을 통째로 만날 수도 있다.


  입구로부터 복도 양쪽에는 기증도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연구소 등 낯익은 국책연구기관부터 여러 개인학자들에 걸쳐 오랜 연구의 흔적들이 구석구석 담겨 있다. 기관의 책들은 당연히 그 기관에서 발간한 책들이니 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 것이다. 개인이 소장했던 것들은 그들의 학문과 사상의 지평이 닿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들이니 이를 따라가며 읽어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을 것 같다. 



  도서관은 총 3개 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관에는 좀더 편안한 쇼파와 이렇게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1,2관은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반면, 3관은 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나도 맥북질을 할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다.ㅎㅎ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 42_서한집1.


  이 도서관에서 나의 시선을 고정시킨 첫번째 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이 되겠다. 평소 투철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갖고 있던 자도 아닌 내가, 왜 굳이 이 책에 시선이 멈췄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저렇게 단단한 책을 수십권이나 정연해낸 저자들의 노고가 내 가슴에 다가온 것이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아! 어제가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이었구나. 내 무의식이 나를 이리로 인도한 것이다. 역시 난 뼛 속까지(to the core) 대한국인이었다.ㅎㅎ 

 그 중 서한집을 골라 내 자리로 가져왔다.



  이 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인사들이 내부적으로, 대외적으로 교환했던 서한(편지, 전보 따위)들을 수록하고 있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백건의 서한들이 정리되어 있다.  



  임시정부는 중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였지만, 임시정부와 관 련인사뜰은 중국대륙과 만주롯하여 연해주 미주지역 등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 고 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사다양한 방법으로 임시정부와 관련한 소식을 전하거나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가 펀지, 서한이었다. ([해제] 부분에서 그대로 옮김.) 

  본문에는 아래와 같은 역사의 현장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1942년 10월 7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이다. 

 ▲1942년 10월 7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이 책을 살펴보며 알게 된 것은 당시 상당 기간(1919-1924) 임시정부의 수반(집정관총재, 대통령 등으로 칭함)으로 있었던 이승만이 사실상 많은 부분에서 책임을 방기했었다는 것이다(이는 한시준 교수가 적은 [해제]를 따른 것이다). 급기야 그는 1924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기에 이른다. 이를 둘러싼 임시정부 내부에서의 갈등과 전개과정이 서한집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마무리


  이 도서관은 일찌기 없었던 새로운 문화공간을 만들어냈다.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또는 혼자서, 누구나 편하게 찾아 꼭 독서가 아니더라도 문화적 감수성을 채워 가기엔 충분한 곳이다. 

  종이책이 앞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과 같이 검색대에서 키워드만 입력하면 눈 앞에 나타나는 그런 책이라면, 인터넷으로 결제하고 집으로 받아보는 그런 책이라면, 결국 전자책과의 경쟁에서 점점 더 불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구? 전자책은 종이책의 좋은 점만 점점 더 학습해갈테니까.

  하지만 이곳처럼 원하는 책을 의도적으로 아예 찾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도서관에서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는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해진 체계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의 책읽기와는 정반대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책읽기를 강요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종이책의 미래를 본다. 길가다 우연히 들었던 좋은 음악이 하루종일 귀에 맴도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만난 좋은 책이 가져다 주는 울림은 전자책이 결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대형서점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도 일정부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문구의 [관촌수필] 등 몇권의 책을 좀 더 훑어보다 도서관을 나섰다. 고등학생 때 문학선생님께서 충청도 말을 가장 잘 다뤘던 작가로 이문구를 추천해주셨었는데, 근 15년 만에 처음으로 펼쳐들어 본 것이다. 충청인으로 태어난 자로서 이제서야 과업을 완수한 기분이다. 서점에 가도 한국문학 코너는 수년 째 가본 적이 없는 나같은 <비문학적 인간>에게 여기가 아니었다면 절대 없었을 일이다.

  아주 저렴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음식맛 만큼은 보장할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세련된 까페는 덤이다. 나머지 몇 장의 사진을 더하고 기행기를 마무리한다.


▲잘 안하는 짓인데, 이곳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한번 찍어봤다.


2015.02.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