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서거 6주기를 맞아 그의 서거일을 회상해보았다.)
2002년 대선은 내가 투표권을 얻게 된 후 경험한 첫 선거였다. 노무현 후보는 경선에서 막판 뒷심을 발휘하며 야당의 주자가 되었다. 여당 주자는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장 후보였다. 사실 나는 노무현 후보를 선택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를 했을 것 갔지만, 당시에는 ’법과 원칙’, ‘대쪽’이라는 경쟁후보의 이니셜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나는 늘 그를 비판하는 편에 섰다. 정치에 대한 많은 관심과 공부로 그를 공격하는 데 필요한 어느 정도의 자산도 갖추고 있었던 나였다. 탈권위적이고 서민적인 모습은 마음에 들었지만, 지지자들을 배신한 것으로 보인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성토의 자리로 뻗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날선 비판과 공격은 사실 그에 대한 기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퇴임한 이후 완전히 자연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추억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매체를 장식하는 전직 대통령의 활약상(?)은 살아있는 권력에게는 늘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이유 모를 죽음을 맞던 날, 나는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지난 날 너무 과도하게 그를 몰아세웠던 것들에 대해 말이다. 늦은 참회를 위해 나는 봉하마을로 향했다.
1.
2009년 5월 23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오전 나는 아버지를 도와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나도 사진의 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와 큰매형, 그리고 나는 이른 아침 채비를 해 논에 나가 있었다. 매형과 둘이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즈음, 멀리서 큰누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내 시선에 포착됐다. 새참을 내어 오기에는 다소 이른 시각이라 의아했지만, 본래 누나가 정이 많고 부지런한 사람이라서 그러려니 지켜보고 있었다. 누나의 목소리가 여기에 닿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누나는 충격적인 한마디를 건냈다. “노무현 죽었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도는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평소 정치인들에 대해 존대의 호칭을 사용해본 적이 별로 없다. 당시 노무현대통령에 대해서 역시 마찬가지였다.2.
당시 사건은 평소 보수적이시던 아버지에게도 충격이었나보다. 아버지께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아. 아니 그게 무슨 일이냐..” 같은 말씀을 읊조리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전직 대통령의 퇴임 1년만의 서거는 모든 이에게 큰 충격이었다. 하던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때는 점심 무렵이었는데, TV 전 채널에서 뉴스특보를 방영하고 있었다. 그날은 오후 내내 뉴스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새로울 것이 없는 반복되는 기사뿐이었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뉴스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3.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즉시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봉하마을에 가자.” 당연히 수락할 것이라 생각했던 친구 A와 B만 골랐다. 그들은 당연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경남 김해로 가는 방법은 차량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나는 차가 없었으므로 남양주***에 있는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24일) 오전에는 충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1시에 차량을 인도받기로 하고, 부천에 살던 두 친구는 1시 30분에 잠실에서 픽업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내가 군복무 하던 곳. 당시 나는 전역을 5개월 앞둔 군인(장교)이었다.4.
24일 오전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신문가판에 내어있던 오늘자 신문들을 모두 구입했다. 어제의 역사적 사건을 세상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오래도록 남겨두기 위함이었다. (며칠 후 한겨레21 따위의 주간지들도 모두 사두었다.)5.
어찌나 세게 악셀을 밟았는지 출발한지 3시간 반만에 진영IC에 도착했다. 철저하게 내비게이션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봉하마을로 가는 길은 기다란 주차장이나 다름없어서, 내비를 보지 않고도 어느쪽으로 가야할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길을 가다 더 이상 차로 이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우리는 도로 한편에 차를 주차하고 걷기로 했다. 그렇게 30여분을 걸었을까. 너른 들판 너머로 대통령 사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곳부터 그곳까지는 조문객으로 긴 인간띠를 이루고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많은 어른들이 자식들을 안거나 이끌어 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우리는 한참을 더 걸었다.6.
분향소에서는 한번에 열스무명 가량이 한번에 조문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마저도 긴 줄에서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가능했다. 절을 한 사람은 바로 뒷사람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 자리에서 더 오래 고인을 추모하고 싶었지만, 내 욕심만 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주로는 고인과 함께 했었던 몇몇 분들이 돌아가며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사저 주위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방금 막 조문을 마친 사람들이 좁은 자리에서 간단히 음료 정도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부엉이바위를 비롯한 주변을 간단히 둘러본 후 다시 되돌아갈 채비를 했다.7.
조문을 마친 시각이 약 7시쯤 되었던 것 같다. 다시 한 시간 가량을 걸어 차량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 우선 저녁을 먹을 주변 식당을 찾았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두부버섯찌개로 허기를 달래고 8시 반 가량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올라가는 길은 무척 피로했다. 내가 졸지 않도록 두 친구는 번갈아가며 나를 각성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부천에 도착하여 두 친구를 내려주고, 부대 숙소로 돌아온 시각이 1시 반이었다.
무척 피곤한 하루였지만, 지금껏 내가 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내가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있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이미지 출처: 노무현재단
2015.05.2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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