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진짜 ‘이방인 되는 법’
여행을 왜 하느냐 물으면 그냥 재미, 휴식, 일상으로부터 탈출 등 다양한 대답이 나올텐데, 나는 오래 전 봤던 어떤 글 이후로 ‘이방인 되기’를 여행의 묘미로 답하곤 해왔다. 내가 사는 곳엔 나를 아는 이가 여럿 있지만, 여행지엔 날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난 정말 이방인이 될 거란 발상이다. 이방인이 되면 평소 새로운 느낌과 생각, 새로운 시각이 싹틀 거란 기대도 가졌다. 그런데 요즘 이 생각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어느 여행지를 가서도 내가 이방인이 ‘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방인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이른바 ’존재감’이 있어야 이방인도 된다. 이방인이란 예기치 않은 표류로 낯선 땅에 불시착했던 하멜과 같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코쟁이’를 처음 보는 현지인으로부터 심한 경계나 공격을 당했을지 모르고, 호기심 많은 꼬마녀석들 때문에 무척 시달렸을 것이다. 아무 데나 만져보려 달려드는 이들 때문에 지금 기준으로라면 숱한 추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현지인의 ‘관심’을 받으며 동물원 원숭이든 맹수 수준의 존재감은 있어야 이방인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웬만한 여행객으로서 ‘이방인 되기’를 꿈꾼다면 그건 웃픈 객기일 뿐이란 게 내 생각이다.
아 여기서 현지인은 모든 현지인이 아니라, 우리 여행객과는 전혀 무관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이며 물건이나 숙박을 파는 사람은 제외한다. 물론 내 가방 속 지갑을 노리는 그분들 역시.ㅎㅎ
외국을 여행할 때마다 내가 만난 현지인 대부분은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더라. 내가 쳐다보거나 말이라도 걸라치면 오히려 귀찮아 하는 것 같았다. ‘쟨 뭔데 자꾸 처다봐?’ 이러면서..ㅎ 그리고 나 같은 여행객이 무슨 대수라고 그 사람 일상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겠나 싶다. 이번에 통영과 고령을 다녀 오면서도 현지인을 보며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처럼 내륙에서 나고 자란 놈이야 갈매기소리 뱃고동 소리에도 발광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분들 눈에 대수롭기나 하겠는가. 나 같은 놈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존재감이 없으니 내 ‘이방인 되기’ 기획은 늘 실패일 수밖에 없다. 아무 데서나 이방인이 될 수는 없다.
진짜 이방인이 되려면 정교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내 나름대로 타지에서 이방인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봤다.
위에 언급한 이야기를 토대로 보면 일단 첫 번째 방법으로 ‘희소성’이다. 그곳에 나 같은 놈이 별로 없으면 쉽게 이방인이 될 수 있다. 현지인에게 내가 무척 생소한 녀석이라면 날 보고 신기해 하며 달려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국인이 잘 안 가는 여행지에 가야 한다. 비행기를 서너번 갈아타야 갈 수 있는 나라라든지, 여행금지국가로 향하자. 단 첨부터 이방인으로 시작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현지인화되어 이방인 되기의 감동이 줄어들 수는 있다.
두 번째 방법은 스스로 현지인화 되는 것이다. 이민자나 유학생 중에 수 년 내지 수십 년을 현지에 살고도 스스로 이방인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있더라. 잘 생각해보면 그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 취급도 당하는 게 아닐까. 처음엔 그저 동양에서 온 아무개 취급을 받으며 별 관심을 못 받는다. 그러다 현지인과 좀 가까워지면 존재감이 싹트고 어느 순간 자기도 그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기쁨을 누릴 만한 때가 될텐데, 바로 그 무렵 언어문제와 약간의 차별을 경험하고는 ‘난 여기서 이방인이구나!’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정착한 새터민이나 다문화가정에서 토로하는 문제도 비슷하다. 아마도 오래 알면 차이가 두드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지인화 될수록 더욱 더 이방인이 된다. (성공적으로 현지사회에 적응한 사례도 많지만.) 그러니 한 곳에 제법 오래 머무르며 현지인처럼 되는 여행을 해보자. 그럼으로써 현지인이 날 이방인 취급해주길 바라는 거다. 일부러 현지적응을 포기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다.
▼통영여행(7/27-28)
2017.07.29.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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