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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사회&문화

정치인의 눈물과 남영동 대공분실

by 라떼아범 2014. 5. 31.

(이 글은 최근 일어난 일련의 눈물정국을 보며 비통함을 담아 적은 것이다.)


  어제 또 한명의 후보자가 눈물을 흘렸다.(그 사람이 왜 눈물을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을테니 인터넷기사를 찾아보시라.)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슬프거나, 감동을 받았거나, 억울하거나, 때때로 무척 기쁠 때, 웃길 때에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가끔 눈물은 상대의 이성적 판단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자신이 의도한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어린 아이가 부모로부터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눈물을 활용한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며, 정치인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흘리는 눈물 또한 정치적 노림수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눈물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기에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보기 전에 제3자가 그 눈물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단지 눈물을 흘리는 맥락을 통해 그 이유를 어느정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정치인이 흘리는 눈물이 그의 인간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봉사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나라처럼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에서라면, 그 효과는 특히 클 것이다. 그것이 의도되었든 우연이든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몇몇 정치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눈물을 흘렸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물론 저마다 제각각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 이유들이 모두가 ‘건전한’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것이 바로 내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나는 그들의 눈물이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이윤에 주목하여 ‘의도적으로’ 눈물을 ‘연기'하였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정말 '나쁜' 정치인이다. 그 순간 분명 그들은 진정 '진지'하였고 '진심'이었으리라 믿는다.(믿어본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상황을 이해해보고자 이 글을 적는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어째서 저렇게까지 나약한 모습을 보였느냐 하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 앞에서 가면을 쓴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이를 ‘페르소나'라고 하여,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바꾸어 쓰며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하였다. 그 가면은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감추기 위한 무의식의 발현이다. 그래서 누구나 웬만큼 친해지기 전까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먼저 드러내는 일은 없다.

  그러나 실상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고 불완전하다. 단지 그것을 감추려 할 뿐이다. 눈물은 자신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표현양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강인해보이기 위해 애써 눈물을 감춘다. 가부장적 문화 안에서 우리 아버지들이 혼자서 울지언정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그런데 엄청난 권력과 명예, 재력,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어쩌면 스스로는 우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고귀한 신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그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들조차 결국은 우리 소시민들과 같은 한낱 나약한 존재라는 것인가? 우리는 그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그 해답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찾아보았다. 군부독재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은 치안본부에서 대간첩 수사를 명목으로 무수한 고문수사를 벌였던 곳으로 악명이 높다. 고 김근태의장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십여일 간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거대한 권력에 맞서 수없이 광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맨발로 골목을 누볐을 민주화투사들조차, 이 곳에서 자행된 엄청난 인격적 모독 앞에서 결국 자신의 인간적 고결함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발가벗겨진 육체만큼이나 개인의 가면 역시 철저히 발가벗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지하철 안 일상을 보내던 시민들은 바로 옆 5층 건물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정치인의 눈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자신들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눈물이 철저한 기획의 결과물은 아닐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정확히는 이 눈물이 또다른 가면의 일종이 아니길 바란다.) 그렇다면 절대 공감할 수 없는 그 눈물의 이면에는 그들 스스로 철저히 감추고 있던 민낯을 드러내게 만든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가벗겨진 민주투사들 만큼이나 ‘고결한’ 정치인들을 발가벗게 만든 그 ‘무엇’ 말이다. 민주투사들을 발가벗게 만든 것이 모진 고문과 인격적 모독이었다면, 정치인들을 그렇게 만든 그 무엇은 다름 아닌 정치적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지극히 '사적'이다.

  고문의 무서움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사적 욕망'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  어떤 것이길래 그 것을 쫓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면마저 벗어버리게 만드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 사적 욕망이라는 것이 고문과 같이 굉장히 파괴적이며, 그들을 서서히 병들어 가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일상의 감옥에 갇혀 이를 바로 보지 못하는 시민의 삶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몇십년 전 남영동 대공분실 밖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끝. 

▲ 영화[남영동1985] 포스터 - 출처 Daum영화


2014.05.31.(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