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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사회&문화

"더불어 숲" 신영복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by 라떼아범 2016. 1. 16.

(우리 사회의 큰 어른 신영복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하던 일을 멈추고 선생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보았다.)



신영복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 신영복 선생님 생전 모습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책읽기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학창시절, 책을 무척 사랑했던 큰누나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책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신영복 선생이 20년 간 옥중에서 쓴 편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그동안의 내적 자기성찰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어린 나이에 깊이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선생이 걸어온 인생 자체와 책에 담긴 사상의 지평을 접하면서 지나치게 순진했던 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침 시골집 책꽂이에는 선생의 또다른 저서 <나무야 나무야>와 <더불어 숲>도 꽂혀있었다. 위 세권은 신영복 선생이 출간한 책들 중 처음 세권이었다.

  2006년 7월 군에 입대하여 11월부터는 전남 장성의 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느 날 주말 동기들과 광주 시내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마틴스콜세지 감독 <디파티드>도 봤다), 광주를 대표하던 충장서림에서 책을 몇권 사왔다. 그 중 한 권이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다. 동양철학에 대한 호기심과 달리 선뜻 배울 용기를 내지 못했었는데, 신영복 선생의 실제 강의가 책으로 엮여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구입한 것이다.

  <강의>에는 논어부터 맹자, 주역에 이르기까지 동양철학을 대표하는 고전들이 담겨있다. 선생의 독특하고 깊이있는 해제와 알아보기 쉬운 문체 덕분에 나와 같은 문외한이 처음 동양철학에 입문할 때 참고할만했다. 그 찬란한 이름들에만 익숙할 뿐 사실 그 고전들의 현대적 의미를 생각해본 바 없었던 나로서는 여간 감동적일 수 없었다. 어렴풋이 ‘나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을만큼 학식을 갖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동양철학을 강의하는 저자의 내공이 그때만큼 그럴싸해 보였던 적이 없다. 

  <강의>는 이후 나의 책읽기 습관도 바꾸어 놓았다. 이 책 이전까지 나는 모든 책을 눈으로만 읽었었다. 수험서나 전공서적을 제외하면, 서적에 밑줄을 긋거나 표식을 달아야 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는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며 꼼꼼하게 읽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지식과 통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일부 문학책 등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책을 연필과 함께 읽는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내 동선 어디에든 연필과 샤프를 두었다. 이제는 연필이 없으면 아예 책읽기를 시작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주로 연필을 사용하는 이유는 밑줄과 메모를 후일에 혹시 수정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학자로서 스승으로서 선생이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사회의 어른으로서 모범 그것이었다. 부끄럽지만 사실 나는 선생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선생은 깊은 사색과 성찰을 관념의 테두리에 가두지 않았고, 늘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부터 군불을 지펴 오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온갖 부조리에 두 눈을 가리고 입을 다무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가 얼마나 흔한가. 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길을 먼저 보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신영복 선생. 산 지성인으로서의 선생의 삶과 사유는, 그야말로 내가 좇아야 할 삶의 표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의 철학과 신념은 나의 삶 이곳저곳에 스며들었다. 군대 전역 후 부임한 학교에서는 학급 급훈을 만들어야 했다. 부끄럽게도 이렇다할 생각이 없던 내 머릿속을 스쳐간 두 단어가 있었다. “더불어 숲”. 사실 이제는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도 않지만, “더불어 숲”이라는 말은 이미 내 신념체계 안에 공고히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학교에 있었던 2012년까지 내가 맡은 반의 급훈은 언제나 “더불어 숲”이었다. 

  나는 자주 안 하는 소주도 기왕이면 <처음처럼>만 마신다. 소주 매니아가 아니기에 사실상 브랜드별 소주 맛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단지 병표면의 “처음처럼” 서체를 선생께서 쓰셨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무조건 <처음처럼>이다. 술자리에서 병을 들어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잠시나마 언젠가 나의 “처음”을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 술은 선택받을 만하다.

  그런 신영복 선생께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한번 뵙고 꼭 같이 사진 한장 찍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어 더 가슴이 아프다. 

  지금 생전에 선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보고 있다. 나이가 좀더 들어 내가 정말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면, 신영복 선생님 같은 모습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6.01.15.(금)